판타스마고리아


<번 더 스테이지: 아름다움은 언제나 과정에 숨어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몇 시간 후에 공개될 <번 더 스테이지> 마지막 에피소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번 더 스테이지>는 지난 2017년의 방탄 Wings 월드 투어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유튜브 레드를 통해 지난 4월부터 매주 1화씩 공개돼 왔다. 드디어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다큐를 시작하는 1화에서 슈가와 RM은 이렇게 포문을 열었다.



“수많은 콘텐츠와 영상을 통해 우리 모습을 팬들에게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 같아도 실은 엄청 가리고 약점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좀 더 날 것의 우리 무대 뒤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도 ‘그냥 똑같은 사람이다’라는걸 보여주고 싶어요”



날 것의 모습이라. 



V앱과 유튜브, 트위터, 블로그를 통해 제공되는 수많은, 그야말로 다 보는게 불가능할 정도의 방탄 관련 콘텐츠들. 그걸 뛰어넘는 차별화된 솔직함을 보여주겠다는 얘기인가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리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 영화 전공자로서 촬영과 편집의 원리가 얼마나 만드는 이의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가동되는지 십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티스트의 솔직함을 약점으로 인지하는 일부 팬들의 반발을 회사가 결코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남겨둔 지금, 고백하자면 나는 울었다. 


다큐가 너무 슬퍼서도, 격한 팬심의 발로도 아니고, 그저 매번 에피소드가 시작되기만 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삐져나왔다. 그리 오래 된 옛일도 아닌 불과 작년 투어의 무대 비하인드를 보여주는 영상을 보고 울다니. 팬이 된지 얼마나 됐다고. 난 어딘가 고장난걸까. 위기의 중년이 겪는다는 ‘고장난 수도꼭지 신드롬’도 아니고, 도대체 이 다큐의 뭐가 어떻길래 나는 울기씩이나 했을까. 다큐의 내용을 살펴보자. 




<번 더 스테이지>는 월드 투어 무대와 무대 뒤의 모습, 그리고 투어 사이사이 멤버들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보여준다. 투어 도중 이들이 그리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싸가지고 온 장비를 호텔방에 풀어놓고 음악 작업을 하거나, 투어가 열리는 도시의 미술관이나 아쿠아리움을 방문하고, 유명하다는 핫도그를 사먹고, 바다에 가서 잠깐 난 짬을 만끽한다 (무대 동선에 대한 진과 뷔의 언쟁이 잠시 나오지만, 언제나 그랬듯 멤버 모두가 모여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으며 해결하는 전형적인 ‘방탄식 갈등 해결법’을 보여준다).  

 

다큐 에피소드 전반부마다 무대에서 공연 전 리허설을 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흑백 화면으로 보여주는 몽타주 시퀀스가 있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리허설을 하는 멤버들은, 때론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진지하게 디렉터와 무대 논의를 하고, 때론 서로 시시껄렁한 장난을 치면서 무대와 무대 사이의 리허설 타임을 보낸다.  



그중 내 눈을 잡아끈 것은 사이사이 멤버들이 빈 객석을 바라보는 어떤 찰나의 표정들이었다.     






이제 갓 이십대 초중반에 들어선 멤버들은, 자신들의 세계적 명성에 막 불붙은 시기에 시작된 투어의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무대가 주는 압박감과 두려움, 팬들에 대한 감사... 거기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을거다. 







멤버들의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텅 빈 객석 앞에 서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느닷없이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혔다. 


그건 마치, 이 모든 열광이 가라앉고 조명이 꺼졌을 때, 그러니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방탄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느낄 감정을 대리 체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시절의 열광과 갈채, 지난한 연습의 과정, 압박감과 성취감. 이 모든 걸 뒤돌아보는 방탄의 뒷모습을 미리 시간을 거슬러 몇십년뒤의 미래에서 이들과 함께 보고 있는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인간은 유한하다. 백년도 못되는 삶을 살다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이 유한함이야말로 인간을 매일 충만하게 살도록 부추기는 원동력이라는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명성 역시 유한하다. 방탄의 일거수일투족에 숨 넘어가고 죽고 사는 팬들의 열광도 때가 되면 맥주 위의 거품처럼 자연스레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한한 명성 너머, 시대의 아이콘으로 무한히 각인된 이름들을 알고 있다. 마이클 잭슨이, 롤링 스톤즈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비틀즈가 그랬다. 서태지도 그 길을 가고 있다. 방탄도 시대의 공기가 허락한다면 아마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방탄의 뮤직 다큐멘터리가 선보이는 세계는 기존의 전설적인 음악 다큐멘터리와 비교했을 때 사뭇 특이한 점이 있다. 일례로, 롤링 스톤즈의 투어 다큐멘터리는 거의 다큐 역사에 남을 만큼의 반향을 일으켰다. 무대 위의 열광과 무대 뒤에서의 소동 및 개인사를 보여주는 그들의 다큐는 마약, 록큰롤, 프리 섹스가 만연했던 60년대라는 시대의 공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걸작으로 꼽힌다. 범상한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아티스트의 기행이 예술의 표식으로 통용되곤 하는 흐름은 여타 뮤직 다큐에서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번 더 스테이지>는 한 뼘 다르다. 투어 사이의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는 방법이래봤자 함께 모여 밥 먹고 수다 떨고 작업하고 게임하고 관광을 하는게 다다. 이런 모습은 아티스트의 남다른 면모를 강조해왔던 기존의 다큐의 방식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있다. 더할 나위없이 평범하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무언가가 반짝인다. 


신비화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그저 나나 내 주변 친구들이 흔히 할 법한 일들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좀더 나아가고 싶다는 공통된 열망을 멤버들은 마치 짠 듯이 쏟아낸다. 열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오늘도 그들의 일상은 지난한 연습과 자기 반성의 과정으로 채워져있다. 반짝이는 단 한순간의 열광과 환호성을 위해 그들은 매일을 마치 수도승처럼 자기 계발의 순간으로 채워넣는다.  



방탄 기획사 대표인 방시혁 피디는 방탄이 ‘친근한 이웃의 오빠’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힌 바 있다. 친근한 옆집 애들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영웅. 그들의 그 ‘일상’이 어떤 피와 땀과 눈물의 과정으로 이뤄져 있는지 <번 더 스테이지>는 또 한번 증명해준다.            



그들의 커리어를 한 단계 도약시킨 2017년을 지나 2018년에 온 우리들. 우리는 <번 더 스테이지>를 통해 1년 뒤의 미래에서 그들의 과거를 목격하고 있다. 동시에 몇십년 뒤의 미래에 서서 지금 한창때의 방탄이 써나가는 서사를 다정하게 회고하는 마음으로 이 다큐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알고 있다. 이 반짝이는 무대 너머에서 그들이 얼마나 매일을 충실하게 피, 땀, 눈물 그리고 웃음으로 써나가고 있는지. 나의 이 노스탤지어는 너희의 충실한 오늘에 대한 감사에 다름 아니다.     


앞으로 굴러갈 시대의 수레바퀴가 그들 편에 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