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프로야구의 태생이 독재정권의 3S정책 하에 태어난 불순한 것이건 말건

지금의 한국야구팬들에게 프로야구는 그저 뛰고 달리고 치고

그 가운데 흘리는 땀, 때론 피, 피어나는 흙먼지와 거대한 함성,

그리고 치맥으로 기억될것이다.

 

80년대 해태 팬이었던 나는 단 한번도 무등경기장에서 야구를 본적도

가슴 졸이며 응원을 해본적도 없다.

 

응원을 해도 이겼고 안해도 이겼던 그때,

길바닥에서 자는 노숙자를 감독으로 앉혀도 해태가 우승할거라는 그 시절에,

팬들에게 해태는 단지 광주 시민들의 연고 구단이 아니라

억눌린 분노를 보란듯이 걷어올려주는 거대한 돌파구였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있었다.

선동렬, 이순철, 김성한, 김봉연, 한대화, 김응룡....


80년대의 거인들이 해태에만 있었던건 아니다.

그중에서도, 이제는 돌아올수 없는, 그래서 그 이름만 불러도 울컥해지는

꼬장꼬장한 금테안경의 최동원이 있었다.

뛰어난 실력과 그 실력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만큼 특별했던 아우라.

이것이 모이고 전해져 전설을 만들었다.


영화 <퍼펙트 게임>은 이젠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난 전설, 

최동원을 향해 쓴 러브레터다.


영화 속 최동원은 투수로서의 완벽함을 위해 동기와 술자리도 갖지 않고

매일 새벽 조깅을 하며 자기가 등판한 게임은 이기든 지든 자기가 마무리짓는 투수다.

마치 고행을 통해 도에 다가가는 수도승처럼 야구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타고난 실력에다 적당히 명성을 즐기면서 스스로에 도취되어 있는 영화속 선동렬에 대비되어 더욱 극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둘의 맞대결이 성사되면서 전 국민이 이들을 주시하게 되고

락커 속 깊숙이 숨겨놓은 '넘지못할 산' 같은 최동원에 대한 존경과 꺼림칙함을

선동렬이 직접 자기손으로 찢어 없애면서 이들의 대결은 극으로 치닫는다.

 

애시당초 이 대결에서 선동렬이 이길 확률은 전무하다.

게임의 결과가 어찌됐든 감독이 만들어놓은 승자는 최동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의 전인생을 독하게 승부에 걸어놓은 한 인간의 파괴적인 철저함이기 때문이다. 

 

대결이 진행되며 해맑은(?) 선동렬조차 그 구도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최동원의 게임이며 최동원의 인생이었고

선동렬은 단지 그 족적을 비슷하게나마 밟아보려하는 후발주자에 그친다.


영화속에서 롯데가 패한 날

롯데 팬들이 선수들에게 오물을 던지고

해태 버스에 불을 지르고 해태 팬들과 육탄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편하게 키득거릴수가 없었다.


잠실에서 기아 경기가 끝난후

경기에 졌던 이겼던 상관없이 경기의 여운에 쌓여

불꺼진 운동장 앞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숱한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치 다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고아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왜 이 하찮은 공놀이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가.

공과 글러브 배트 하나만 들고나와 맨몸으로 처절하게 끝날때까지 얻어터지는 게임.

그 그라운드에 오르려면 일단은 특출난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특출난 개인들이 모든걸 벗어던지고

결과가 정해질때까지 몇시간을 인내해야하는 게임.

게임을 관람하는 우리 평범한 대부분의 인생들에게

그런 다이나믹하고 숨막히는 all or nothing의 대결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 관람할수 있는 자격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평범해서가 아니라 실은 인생이 그래서인것이다.

야구경기가 펼쳐지는 9회 동안의 시간은 어쩌면

인생이 그렇게 범상한 일들로 점철된 요철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잊게해주는

최고의 판타지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 가짜 판타지 안에서

실제의 피와 땀을 흘리며 간혹 목숨을 걸며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평범한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것이 어쩌면 진짜 인생인지도 몰라....' 말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야구장에 간다.

'저기 진짜 인생이 있어' 설레어하며.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