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두달여간, 나를 두근거리게도 피곤하게도 했던 드라마가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있다"란 말을 남긴 채 방금 끝났다.


한번도 철저히 파헤쳐지고 제대로 마감된 적이 없어 늘상 되풀이되는 재난 속을 살아가는, 마치 거대한 미제사건 덩어리같은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은유.
문제 해결에 현실적 서사가 아닌 '과거로부터 온 무전'이라는 주술적 서사를 동원했지만, 이를 통해 급기야 현실적 공명을 일으키는 파급력. 


드라마 <시그널>이 보여준 성취는 말할수 없이 대단했고, "포기하지마라" "미래는 바꿀수 있다"는 드라마의 직설 화법은 잠들어있던 투쟁심을 꿈틀거리게 했다. 


한때,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르크스도,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도, 6.8혁명의 프랑스 대학생들도, 87년 광장에 모인 한국 사람들도 다들 이런 꿈을 꾸며 그 가능성에 전율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느냐고,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살기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모양을 바꿔 덮쳐오는 파도로 인해 혹독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꿈을 꾼 사람들 덕에 지금 우리 손으로 대통령이라도 뽑을수 있게 됐지 않았느냐고 소심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하며 어깨걸고 싸운다고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그야말로 복잡다단한 세상에 살고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그널>이 일깨운 투쟁의 불씨를 있는 그대로 믿고 실행하기엔 너무 냉소적이고 지친 시대에 와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적당히 지쳐있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감상하던 내 주의를 끈 것은, 극중 이재한 형사의 어떤 태도였다. 돈과 권력이 바로 세상 이치라며 "니가 이길수 있을것 같아"라며 이죽거리던 김범주와 대충 하고 그만두지 언제까지 그렇게 피곤하게 살거냐는 동료형사들의 충고에도, 수그러들지 않은 어깨로 "그렇게 살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꼿꼿이 가던 길을 가는 이재한의 태도에는 정치적 투쟁심을 넘어서는 어떤 품위마저 느껴졌다. 


"나랑 생각이 달라? 그래. 그럼 넌 니가 믿는대로 살아라. 난 내가 믿는대로 살테니". 그렇게 남들이 포기한 사건을 좇아 골목을 누비며 수첩을 들고 기록하는 그의 모습은, 나쁜놈한테 잡혀 변을 당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성실하게 걷고 뛰고 묻고 있을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한다. 그의 그런 성실함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연쇄살인으로 첫사랑을 잃고난 이재한에게, 수사란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떼어낼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연민은 범죄자에게는 죄를 묻고 피해자에게는 제대로 된 진상을 밝혀줘야 한다는 믿음과 '뿌린대로 거둔다'는 세상만사의 섭리를 존중하고 지켜내려는 의지로 연결된다. 의협심이나 투쟁심만으로 이어가기에 돈과 권력, 조직의 압력은 때론 촘촘하고 때론 너무 강력하다. 더구나 그런 붉은 색깔의 감정은 시간 속에서 바래기도 쉽다. 그래서 난 이재한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십여년 넘게 지켜준 강력한 동기는 아마도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고, 유불리가 아닌 자신의 삶의 태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우리가 이재한을 보고 느끼는 감동은 여기서 비롯되는게 아닐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협상을 하고싶다면 테이블로 나올 새누리당을 배려하라는 정치공학적 충고를 거리낌없이 하는 젊은 정치인을 보면서, 정말이지 품위따위 없는 세상을 살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민이 사라진 세계에는 품위도 함께 실종된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