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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13 승리호(2021)- 충분히 의미있는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

[승리호]의 시각적 효과에는 손을 들어주지만 내러티브는 실망스럽다는 평을 많이 접하고 이 영화를 봤다. 전투장면을 비롯한 미래 기술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시각 효과는 내가 보기에도 어색함 없이 썩 만족스럽다. 그런데 내러티브는 그렇게 박하게 점수를 줄만큼 실망스러운가? 글쎄. 나는 그닥 거슬리지 않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승리호] 같은 (일종의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 영화를 만들 때 여러 고려해야 할 포인트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마도, 아드레날린을 상승시키는 우주 전투장면, 우주라는 공간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또 갈등 구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이 될 듯하다.

 

조성희 감독의 전작인 [짐승의 끝]은 파국의 세계를 잠식한 폭력을 언급할 때, 영화의 신화적 분위기 그리고 식상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파국의 공간성 때문에 늘 일순위로 참조하게 되는 영화다.

 

그에게 있어 공간은 '프로덕션 디자인이 개입되어야 하는 영화적 캔버스'라는 일차원적 역할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상상이 싹트는 장소성을 지닌다. [짐승의 끝]에서도 [탐정 홍길동]에서도 그랬다. 탈역사적 공간을 이만큼 임팩트있게 끌어내는 감독이 없을 정도다.

 

[승리호]의 주된 서사의 배경인 우주 공간은 우주시대 있는 자들의 낙원인 UTS 궤도/궁극적 이주지인 화성 vs UTS 비시민들이 떠도는 궤도 바깥 공간/게토화된 지구의 대비를 여실히 볼 수 있게 설정되어 있어 일종의 정치적 statement로 작용한다.

 

세부적으로는 낙원의 지속가능한 복지를 위해 우주 쓰레기를 처리하는 공장과 청소부들이 활약하는 우주선 내부가 집중적으로 보여지는데, 청소부들의 우주선 즉 승리호 내부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서 흔히 최신식의 매끈한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공간으로 설정되곤 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치 노예들의 고된 육체 노동으로 전진하는 대항해 시대의 함선처럼 보인다(물론 수백의 노예 대신 전직 마약상 박씨의 일당백 노동으로 커버되긴 하지만).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걸핏하면 고장 나는 이 우주선 공간은 영화에 묘한 현실성을 부여해주는 효과가 있다.

 

[늑대소년]부터 시작된 그의 상업영화 여정에서 주인공은 안티히어로, 어떻게 보면 신념 따위 없는 현실 밀착형 인물로 제시된다. 박보영, 이제훈과 송중기가 모두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 서사 진행 중 만나게 되는 '아이'(또는 아이같은 늑대)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제훈을 들었다놨다 하던 말순이의 영악함이 [승리호]에서는 승리호 크루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꽃님이의 천진함으로 변모했을 뿐, '아이'가 신념 없는 인물들에게 신념을 갖게 하며 이로 인해 극을 전진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동하는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거기다 그 어느 과학자도 권력자도 해적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을, 나노 기술을 체화한 '아이'가 자연스레 실행한다는 설정은 구세대가 개인적 원한과 잘못된 신념으로 자멸한다면 새로운 세대는 그 어느 어른보다 훨씬 넓은 관용으로 그들을 변화시킨다, 라는게 조성희 감독의 세대론인가... 왠지 곱씹어보게 된다.

 

사이버펑크 스페이스 오페라 SF 장르 영화로서, 매우 급진적인 주제의식과 철학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그렇게까진 아니라고 하겠지만, 조성희의 세계관의 우주 판본으로서 공간에 대한 정치적 시각화와 기술을 일체화한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 그리고 아드레날린을 펌핑하는 전투씬 만으로도 일정 정도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다.

 

ps: 덧붙이자면 [탐정 홍길동]에서 내 모공에 소름을 오소소 일으켰던 씬이 대나무 숲인지 뭔지 마을 숲에서 위장을 벗어던진 홍길동 일당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던 씬이었는데, [승리호]에서도 비슷한 소름 돋는 씬이 있었다. 우주선을 순식간에 생분해해서 갉아먹는 나노봇이 파괴가 아닌 생성과 창조의 모멘트로 돌변하며 우주선을 보호하던 씬. 내가 GNR(유전자/나노/로봇) 기술의 미래에 너무 심취해있어 그런지 몰라도, 나노기술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장면이었음. 넘나 초월적으로 아름다워 살짝 눈물 찍.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