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승리호]의 시각적 효과에는 손을 들어주지만 내러티브는 실망스럽다는 평을 많이 접하고 이 영화를 봤다. 전투장면을 비롯한 미래 기술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시각 효과는 내가 보기에도 어색함 없이 썩 만족스럽다. 그런데 내러티브는 그렇게 박하게 점수를 줄만큼 실망스러운가? 글쎄. 나는 그닥 거슬리지 않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승리호] 같은 (일종의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 영화를 만들 때 여러 고려해야 할 포인트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마도, 아드레날린을 상승시키는 우주 전투장면, 우주라는 공간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또 갈등 구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이 될 듯하다.

 

조성희 감독의 전작인 [짐승의 끝]은 파국의 세계를 잠식한 폭력을 언급할 때, 영화의 신화적 분위기 그리고 식상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파국의 공간성 때문에 늘 일순위로 참조하게 되는 영화다.

 

그에게 있어 공간은 '프로덕션 디자인이 개입되어야 하는 영화적 캔버스'라는 일차원적 역할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상상이 싹트는 장소성을 지닌다. [짐승의 끝]에서도 [탐정 홍길동]에서도 그랬다. 탈역사적 공간을 이만큼 임팩트있게 끌어내는 감독이 없을 정도다.

 

[승리호]의 주된 서사의 배경인 우주 공간은 우주시대 있는 자들의 낙원인 UTS 궤도/궁극적 이주지인 화성 vs UTS 비시민들이 떠도는 궤도 바깥 공간/게토화된 지구의 대비를 여실히 볼 수 있게 설정되어 있어 일종의 정치적 statement로 작용한다.

 

세부적으로는 낙원의 지속가능한 복지를 위해 우주 쓰레기를 처리하는 공장과 청소부들이 활약하는 우주선 내부가 집중적으로 보여지는데, 청소부들의 우주선 즉 승리호 내부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서 흔히 최신식의 매끈한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공간으로 설정되곤 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치 노예들의 고된 육체 노동으로 전진하는 대항해 시대의 함선처럼 보인다(물론 수백의 노예 대신 전직 마약상 박씨의 일당백 노동으로 커버되긴 하지만).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걸핏하면 고장 나는 이 우주선 공간은 영화에 묘한 현실성을 부여해주는 효과가 있다.

 

[늑대소년]부터 시작된 그의 상업영화 여정에서 주인공은 안티히어로, 어떻게 보면 신념 따위 없는 현실 밀착형 인물로 제시된다. 박보영, 이제훈과 송중기가 모두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 서사 진행 중 만나게 되는 '아이'(또는 아이같은 늑대)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제훈을 들었다놨다 하던 말순이의 영악함이 [승리호]에서는 승리호 크루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꽃님이의 천진함으로 변모했을 뿐, '아이'가 신념 없는 인물들에게 신념을 갖게 하며 이로 인해 극을 전진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동하는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거기다 그 어느 과학자도 권력자도 해적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을, 나노 기술을 체화한 '아이'가 자연스레 실행한다는 설정은 구세대가 개인적 원한과 잘못된 신념으로 자멸한다면 새로운 세대는 그 어느 어른보다 훨씬 넓은 관용으로 그들을 변화시킨다, 라는게 조성희 감독의 세대론인가... 왠지 곱씹어보게 된다.

 

사이버펑크 스페이스 오페라 SF 장르 영화로서, 매우 급진적인 주제의식과 철학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그렇게까진 아니라고 하겠지만, 조성희의 세계관의 우주 판본으로서 공간에 대한 정치적 시각화와 기술을 일체화한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 그리고 아드레날린을 펌핑하는 전투씬 만으로도 일정 정도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다.

 

ps: 덧붙이자면 [탐정 홍길동]에서 내 모공에 소름을 오소소 일으켰던 씬이 대나무 숲인지 뭔지 마을 숲에서 위장을 벗어던진 홍길동 일당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던 씬이었는데, [승리호]에서도 비슷한 소름 돋는 씬이 있었다. 우주선을 순식간에 생분해해서 갉아먹는 나노봇이 파괴가 아닌 생성과 창조의 모멘트로 돌변하며 우주선을 보호하던 씬. 내가 GNR(유전자/나노/로봇) 기술의 미래에 너무 심취해있어 그런지 몰라도, 나노기술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장면이었음. 넘나 초월적으로 아름다워 살짝 눈물 찍.

Posted by 미와카주

8, 90년대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었다가 IMF로 버블이 꺼지면서 직격탄을 맞은 부모는 잠실의 아파트에서 밀려나 옆 동네 월세 빌라에 살면서도 부동산 버블 시대에 대한 향수와 인생 역전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부모를 지켜보는 감독의 카메라는 그들의 부동산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뒤쫓는다. 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과 부동산 열기는 그대로 베이비 붐 세대의 욕망이 되었고, 베이비 붐 세대인 감독의 부모 역시 화학 공장에서 일하다 집 장사에 눈을 떠 시대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건설과 개발, ‘하면 된다’로 요약되는 시대는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시대에 자리를 내줬고, 그렇게 바뀐 시대의 수레바퀴 아래서 감독의 부모를 비롯한 수많은 개미 민중들이 깔려 죽었다. 이 영화는 게임에서 언제나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바로 그 ‘개미’들에 대한 이야기다. 

<버블 패밀리>[각주:1]의 감독은 부동산 호황기에 ‘집 장사’를 통해 중산층으로 올라선 부모 아래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외동딸이다. 그 딸이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씁쓸한 경제적 몰락 위에 서 있는 부모님의 오늘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적 다큐멘터리의 여러 갈래 안에서도 가족 다큐는 한국적 가족 관계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상당히 껄끄러운 작업이다. 또한 가족의 내밀한 사연을 익명의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기에 복잡한 각오를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 다큐라는 미션을 수행하는 이들은 부모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촬영 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끝나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미움이든 포용이든 말이다. 그래야만 갈등의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객관적인 마음의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조금 이상하다. 부모의 가장 추레하고 비참한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모를 의식하고 마음 쓰는 감독이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살림살이에도 끝까지 부동산 한 방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를, 때론 어이없는 헛웃음으로 대하다가도 곧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기도 한다. 평가하고 해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가 결국은 그 과정에서 부모의 삶의 궤적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영화의 마지막, 엄마가 빚까지 져가며 딸의 이름으로 사둔 임야를 바라보며 감독은 중얼거린다. “이 땅 때문에 빚을 져야했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만 같다.” 감독 자신 역시 부모로부터 환경과 습성과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을 그래서 스스로도 자기 영화의 대상인 부모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씁쓸하게 인정하는 창작자의 태도에 뭔가 신뢰가 갔다면 이상한 얘기인 걸까. 

이 영화는 감독의 가족사를 통해 근현대 한국이라는 공간에 개입해 들어온 자본주의의 문제 즉 지정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한국의 중산층이 87년 절차적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90년대 소비 자유주의시대, 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어떻게 비상하다 추락했는지를, 우리는 부동산의 몰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게임에서 정보와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개미들은 언제라도 치명타를 맞고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영화는 증언한다. 부동산 몰락이 베이비 붐 세대 생애사의 한 챕터였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생애사에는 또 다른 형태의 몰락이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은 2017.06.15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다큐멘터리 초이스에 실려있습니다.

  1. 감독 마민지, 2017 [본문으로]
Posted by 미와카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만행에 대한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처음 수면 위로 올라온 지 25년이 흘렀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1992년에 시작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는 1,200회를 넘겼고, 60대였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으며, 생존해계신 소수의 할머니들은 어느덧 90대가 되셨다. 그리고 지난 2015년 12월 28일,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10억 엔의 출연기금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불가역적인 한일 위안부합의를 맺은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상징인 소녀상은 외교적 논란의 대상으로 비화되어버렸다.  

캐나다 출신 티파니 슝 감독의 <나비의 눈물>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한국, 중국, 필리핀 출신 세 할머니의 일상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는 수요시위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스위스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위안부 문제를 증언하는 활동가의 삶을 바쁘게 살아낸다. 중국의 카오 할머니는 이 추위에 무슨 장작을 패냐는 딸의 타박에도, 아흔이 넘은 노구를 부지런히 움직여 땔감용 장작을 패놓는다.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자식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지만, 같은 마을의 위안부 피해자 모임에 나가는 용기를 낸다. 노래를 부르고 TV를 보고 장작을 패고 끼니를 챙기고 춤을 추고. 할머니들의 삶은 얼핏 보면 평범한 삶의 감각으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문득 그들이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쉴 때 그리고 무언가를 더듬는 듯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볼 때, 주변의 소리와 흐름을 멈추고 정지하는 카메라는 그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채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새어 나오는 긴 한숨 소리와 흔들리는 동공, 그리고 떨리듯 내뱉는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어 (It’s still there)”라는 목소리는, 전쟁 중 성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어떻게 이들로부터 평범한 삶의 감각을 앗아갔는지 드라마틱한 장치의 도움 없이도 그 자체로 천둥처럼 증언한다.  

영화는 유난히도 특정한 신체적 접촉에 주의를 기울인다. 함께 발맞추어 걸어가는 발, 꼬옥 잡고 쓸어주는 손, 옆으로 포개져 누운 채로 함께 이야기하며 안아주는 자식과 활동가의 몸은, 할머니들의 전 인생을 지배해 온 한숨과 정적의 순간을 마치 위로하듯 이불처럼 덮어준다. 여성의 몸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감내한 육체를 쓸어주고 껴안아주는 손은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타인에게 이처럼 소탈한 방식으로 온기와 존중을 전달해 줄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마땅한 대접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의 몸은 비단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성적인 약탈과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일까. 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전시에 일어나는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상대 남성 공동체를 파괴하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전략의 일환으로 실행된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그 여성 자체가 아닌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 대한 모멸과 위협으로 의미화되기 때문에, 전쟁 시 집단 강간은 상대 집단의 재생산과 문화 및 정체성을 파괴하는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20만 명의 아시아 여성을 유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일본군의 도덕적 타락에서 기인한 특수한 악행이 아니며, 남성중심적인 전쟁과 정복의 인류사에서 배태된 결과라는 측면에서 들여다봐야 한다. 

카오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일본군으로 인해 두 명의 아이를 낳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 아이들을 죽였다. 카오 할머니의 딸은 버려진 자신을 입양해 이날 이때까지 키워준 엄마의 놀라운 고백 앞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딸에게도 해줄 것이냐는 감독의 물음에 “해야죠. 아이가 좀 더 크면 꼭 얘기해줄 거에요” 하고 다짐한다. 아델라 할머니는 죽은 남편의 묘에서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아들에게도 뒤늦게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건 내 인생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아들의 몫”이라며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 할머니는 아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돌아온 뒤 “무거웠던 영혼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라 할머니는 영면에 든다. 13세에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일본에 갔다가 위안부가 된 길원옥 할머니는 5년간의 위안부 생활이 끝나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당도한 곳이 고향인 평양이 아닌 인천임을 알게 된다. 곧이어 북한으로 가는 국경이 막히고, 낯선 남한 땅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할머니는 자신이 몸을 의탁하던 곳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받아 자신의 아들로 키워낸다. 비록 끔찍한 트라우마로 얼룩졌지만 이들이 살아낸 삶 그 자체가 바로 용기의 증명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그들에 의해 구원받고 살아남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왜 이런 전쟁을 합니까? 무기를 사들이는 게 평화가 아닙니다. 휴전선에 봄이 와야 진정한 해방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조선인 창녀’라 조롱하며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는 일본 극우세력,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는 외교 부처, 그리고 남성 중심적인 전쟁과 폭력의 역사에 맞서, ‘아직 해방 받지 못한’ 할머니들의 몸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저 너머 어딘가 있을 평화의 땅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나비는 날아올랐다. 폭풍우가 치게 하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이 글은 2016.11.14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다큐멘터리 초이스에 실려있습니다.

Posted by 미와카주


독극물에 마비된 채로 죽은 두 남자. 

그 와중에 자기 말마따나 XX는 지킨 백작.

<아가씨>의 나쁜놈들 응징 장면을 본 지인이 “다 좋은데 나쁜 놈들에게 너무 고상한 죽음을 선사했다”며 어쩜 그게 나쁜놈들과 동성을 지닌 ‘남자’ 감독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두 여자의 인생을 망치고, 그 중 한 여자를 죽게하고, 또 다른 여자의 인생까지 망치려 했던 쳐죽일 짓을 왜 그리 별거 아닌 것처럼 처리한건지. “물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런 어리석은 짓꺼리를 하는게 결국 인간”이라고 퉁치는 듯한 희화화된 결말에 심히 기분이 나빴다고 말이다. 


스스로 손에 가위를 박고 배에 못을 내려치는 <비밀은 없다>의 장면들은 여자감독의 작품이면서도 어딘가 박찬욱스러운데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엔딩에서 연홍(손예진 분)이 종찬(김주혁 분)을 응징하는 방식을 보고나면, 영화가 박찬욱스러운 것은 단지 어떤 스타일에 불과할 뿐 그 본질은 매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머리도 좋지않고 눈치도 없는 엄마 연홍. 남편 종찬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첫 날, 딸 민진이 실종된다. 경찰도 남편도 남편의 선거 캠프도 일단 사태의 추이를 ‘이성적으로’ 지켜보자고 한다. 그런데 이쁜거 빼곤 그닥 볼 거 없어보이는 이 여자는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순하지 않다. 딸의 실종에 정신 못차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어디든 찾아가서 되는대로 헤집어놓고 히스테리를 부린다. 한 마디로 요령없이 일직선으로 사건을 파고든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끔찍한 진실 앞에서 연홍은 그야말로 온 몸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테리를 못 이겨 복수를 망치지도 않는다. 분노의 삽질과 비닐 졸라매기로 남편을 죽음 목전에 이르게 해놓고는, 마지막 순간 남편의 숨구멍을 풀어주며 이를 갈듯 말한다. 


“여기서 너를 죽이면 내가 지는거야. 끝까지 살아 봐.” 


모든 사건의 출발이자 목표였던 남편의 선거 승리에 똥물을 뿌리며 남편을 사회적으로 살인하는, 그야말로 분노에 걸맞는 복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적으로’ 행한다.


보통 이런 식의 이야기에는 갈 수 있는 전형적인 몇가지 길이 있다. 연홍이 진실을 견디지 못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남편을 죽이거나. 만약 자신과 딸의 인생을 똥구덩이에 처박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선거에 눈 멀어 딸을 살인청부한 남편을 죽이는 것으로 연홍이 복수를 완성했다면, 남편의 죄는 죽음 그 자체로 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치지도 죽이지도 않고, 섹스비디오를 상대 후보 홈피에 올려 남편이 가장 원했던 승리를 눈앞에서 짓밟고 거기다 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가진 채로 평생 ‘살아가게’ 만든 연홍의 복수는 현실에서건 영화에서건 우리가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죄의 무게를 그대로 지게하는 복수’라는 복수의 이상향을 목격하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불편하다면 정확히 이 반대 지점에서일거다.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연홍이 차라리 종찬을 죽였다면, 그랬다면 둘 다 공평하게 주고 받은걸로 치고 ‘결함없는 인간은 없다’는 익숙한 윤리적 면죄부를 종찬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 연홍이 미쳐버리고 종찬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통에 홀로 몸부림치는 결말이었다면, ‘원래 세상은 부조리해’라는 체념을 뱉으면서도 어쩐지 삶을 고차원적으로 통찰한 것 같은 허위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어떤 면죄부도 허위 의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봐라. 니가 죄의식조차 없이 저지른 짓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었는지” 일갈하며 착실히 죄값을 치르게 한다. 또한 살인에 살인으로 응하지 않고 자기가 저지른 일만 딱 그대로 세상에 고백하는 결말 때문에, 종찬의 불륜을 그리 죽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일말의 반박거리마저 앗아간다. 얼마나 숨이 막히겠나.       


이 영화가 불편하다는 또다른 측에서는 스릴러 장르의 익숙한 장치에 기대지 않은 색다른 연출적 시도들을 그 이유로 든다. 

  

다소 방만할 정도로 반복되는 주제 선율(leitmotif). 

추리와 혼란을 동시에 야기시키는 디제틱 사운드와 논디제틱 사운드의 혼용. 회상 및 진술 장면에서 익숙한 플래시백 대신 사용되는 CG 처리된 프리즈 화면.   

피가 튄 미옥의 교복을 대신 입은 아이의 단추가 툭 하고 터지자 “넌 왜 그렇게 교복을 타이트하게 입니? 그게 스타일이니?”하는 연홍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단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대목마저 의도적으로 코믹 릴리프처럼 처리하는 방식. 


연출적으로 낯선 시도는 그것이 서사에 찰떡처럼 달라붙을 때에야 비로소 호응을 얻는다. 개인적으로 소녀들의 우정과 감수성을 표현한 시퀀스는 감독 특유의 색깔이 서사에 개성을 입힌다고 느껴졌지만, 그밖의 시도들은 좀 더 친절한 표현법을 고민해봤어도 좋았을거란 생각이다.


마지막 장면. 

“우리 딸이 지 엄마는 좋다 하디?”하는 연홍의 질문에 딸의 친구는 “엄마는 너무 멍청해서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딸의 말을 전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순히 ‘모성애’를 알리바이로 삼는 복수극이 아니라, 한 가족 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모녀가 서로의 고통에 처절히 분노하고 그 분노를 지지대 삼아 서로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녀들과 모녀 사이의 유대가 영화의 강력한 테마로 작용하는 반면, 정치판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유대는 음험하고 얄팍하기 그지없다. <아가씨>에 이어 <비밀은 없다>가 올해의 여성연대 2탄쯤으로 환호받는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일부분 박찬욱스럽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다. 특히 올해의 박찬욱 작품인 <아가씨>와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아가씨>에서 여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분노가 이른바 ‘뒤통수 때리는 탈출의 경쾌함’ 속에 희석되어버렸다면, <비밀은 없다>의 모녀는 있는 힘껏 분노를 발산하되 그 분노로 복수를 망치지도 않는다. 기쁨은 덜하지만 좀 더 정의롭다고 할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미련하거나 혹은 미련이 많아서 제대로 된 복수도 못한 채 ‘부조리한 삶’에 강제적으로 적응하는 여자들이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스크린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Posted by 미와카주

고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미국에서 아트스쿨을 다니던 1998년으로 기억한다. 벌써 18년전의 일이다. 


최근 나온 주목할만한 영화를 보여주고 아티스트와 대화를 하는 "필름 투데이"라는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에 고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이 자신의 영화 <애프터 라이프>(한국제목: 원더풀 라이프)를 들고 와서 학생들과 Q&A를 가졌다.


미련이 많아 사후세계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지대인 림보에 갇혀버린 영혼들의 이야기인 <애프터 라이프>는 예상과 달리 빤한 판타지를 착취하는 나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판타지임에도 기묘한 리얼리티가 끝까지 살아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영화를 보고 멍~하게 충격받은 몸뚱이로 Q&A를 마친 고레에다 감독에게 비칠비칠 다가가 소감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영어가 안되시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일찍이 일어를 열심히 하지 않았나 그날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Q&A에서의 모습도 영화감독보다는 학자 내지 소설가의 풍모가 느껴졌고, 눈이 참 맑았다는 기억이 있다. 아무튼, 영화도 사람도 호감이었던 그날의 인상 이후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좇아가는 동안 그는 깐느에서 상도 받고 어느덧 대가가 되어갔다. 가끔 한번씩 '으응?' 할 만한 작품을 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고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 우아하고 단아한 미쟝센, 배우를 알아보는 눈 등 너무 많은 좋은 점을 갖춘 그는 언제나 내게 있어 소중한 베스트 중 하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뭐랄까, (<걸어도 걸어도>부터 시작된) 오즈 야스지로 풍 고레에다류 영화의 연장 선상에 있는 영화같다. 그의 초기작인 <환상의 빛>, <디스턴스>,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가 상실과 애도로 몸부림치는 현장에 대한 사뭇 냉정할 정도로 담담한 응시였다면,  <걸어도 걸어도>가 나온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고레에다 제 2기 작품들은 인생에 대한 폭넓은 긍정과 따뜻한 응시가 자연스레 오즈의 가족극을 떠올리게 한다.   


아야세 하루카(<호타루의 빛>의 그 유명한 '건어물녀'),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카세 료, 츠츠미 신이치 등 그야말로 일본 영화 및 방송계의 달링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그냥저냥 괜찮은 배우가 좋은 감독을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일으키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사례 같은 작품이다. 아야세 하루카의 멍하고도 단정한 얼굴에서 그 멍함을 외려 책임감 많은 장녀의 신중함으로 읽게 만들고, 광고용 같은 그녀의 미소를 의기소침해 있을 의붓동생을 배려하는 애틋한 노력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 보통의 감독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주에게는 '익히 소비된 스타의 얼굴'에서 '평범한 사람의 빛'을 찾아주는 신묘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막내동생으로 나오는 히로세 스즈(스즈 역)는 <아무도 모른다>에서 야기라 유야가 보여준 '아름다운 어린 얼굴'의 여자아이 버전이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아아악 너무 예뻐" 소리가 절로 터져나온다. 보통은 영화에서 어린 여자애를 이 정도의 애정으로 찍어놓은 화면을 보다보면, 어쩔수 없이 카메라에 눌러붙은 (감독의 혹은 카메라의) 관음증적 시선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관음증적이고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꽃같은 소녀를 보면서 그녀와 동일시가 되기보단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관찰자의 마음이 되어 냉정하게 훑어보게 된다면, 즉 피사체의 객체화/대상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런 관객이라서가 아니라 이미 감독이 그런 시선으로 그 피사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유난히도 스즈를 자주 응시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관객으로서 눈물이 터지는 순간은 주로 스즈가 화면 가득 잡혀있는 순간들이다. "아버지를 돌봐줘서 고마워"라는 큰언니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 동급생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벚꽃터널을 아련하게 응시하는 모습, 마당에서 언니들과 불꽃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카메라가 스즈를 잡을때마다 관객은 피사체와의 거리를 잃고 그녀의 마음에 동일시된다. 어린 소녀를 즐겨 클로즈업하는 다른 감독들이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토록 어떤 관음증의 혐의도 없이 어린 소녀를 바라보는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주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의도가 묻어있었다면, 스즈가 목욕 타월을 그토록 우스꽝스럽고 과감하게 열어젖히는 뒷모습 장면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이야기에 남자를 중요한 갈등의 동인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렸을텐데도, 카세 료, 츠츠미 신이치 같은 일급배우들을 과감히 듣보잡 조연 취급 하며 여자들 주도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의 '정치적 올바름'에도 칭찬을 하고싶다. 큰 갈등의 판을 깔아준 건 아버지가 남기고 간 배다른 자매지만, 이후 그녀들의 세계에 남자가 일으킨 파란은 호수에 번진 물결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 그녀들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고레에다는 휴머니스트에 이어 페미니스트까지 넘보고 있는걸까. 


초기작들이 상실의 빈 자리를 애도하는 처연한 분위기가 다분했다면, <걸어도 걸어도> 이후의 고레에다는 삶의 비의에 대해 조금은 더 포용하고 감싸 안는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얼마나 별개의 존재인지는 익히 보고 들어 알고있지만, 왠지 고레에다의 지금까지를 지켜본 팬의 입장에서는, 그의 영화세계는 보기 드물게 인생에 대한 그의 자세와 정확히 공명하는 것 같다. 


왠지 그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 줄것만 같다.  

벌써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주의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Posted by 미와카주

한국영화의 전통에서 슈퍼히어로물을 찾아보라면 최동훈의 <전우치> 정도가 있을까. (우연찮게도 이 영화의 주연 역시 강동원이다) 


얼핏, 한국영화와 히어로물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그외 수많은 맨들이 존재하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경단주의에서 그 존립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국가권력에 반하지 않으면서 무능한 경찰력과 군사력을 보완해주는 존재로서의 자경단. 


이에 비해 역사의 갈피마다 강력한 중앙집중식 권력과 이에 대항하는 반정권 세력의 대립이 빈번했던 한국에서는 '자경단'이라는 당대 권력의 보완적 세력이 열광적 지지를 얻을 이유가 별로 없어보인다. 


<검은 사제들>은 할리우드산 슈퍼히어로물을 보고 자란 세대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적 재현의 전통(또는 강박) 위에 만들어놓은 아주 묘한 한국식 미스테리 스릴러 엑소시스트 히어로물이다. (마치 떡과 케잌의 조합같달까.) 


슈퍼히어로물 혹은 서양식 첩보스릴러 영화의 장르적 특징은 곳곳에 묻어난다. 


현대 이탈리아의 중세적 예배당. 

악령의 출현을 근심하는 작은 대화들로 이루어진 불길한 오프닝 시퀀스.  

비밀임무의 실패는 더 큰 재난을 불러오고.

이제 임무는 영화의 주인공에게 떠넘겨진다. 

이것은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 같은 미스테리 스릴러물에서 흔히 보아 왔던 전개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영화속에 본격적으로 서울의 풍경이 담기면서부터다.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마치 서울 속의 작은 서울처럼 자리한 명동. 

버텨온 세월만큼 온갖 역사적, 사회적 희비를 다 간직한 명동성당. 

그리고 지금은 무개성의 관광명소가 되버렸지만

한때 예술과 멋의 중심지였던 명동의 좁은 뒷골목.

그 속에 벌집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건물들. 

그 건물의 낭떠러지 같은 오래된 계단들.

그 안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구마의식. 


단지 그 골목에서 몇발자국만 나오면 되는 얼마 안되는 물리적 거리로 나뉘는 

빛과 그림자, 현실과 신화, 쾌락과 공포의 심리적 갈림길. 


한국적 미스터리 엑소시즘 영화의 공간적 사용이 어때야 하는가를 

무척 영리하게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해 일단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서양적인 구마의식과 토착적 공간의 이질적 어울림에 솔깃해 할 무렵

개인사의 어둠에 사로잡힌 최부제가 구마 공간을 뛰쳐나가고 나서부터

영화를 보던 나는 급격히 맥이 탁 하고 풀리는 경험을 한다. 


아... 저놈의 한국적 신파.

 

한쪽 신발을 잃고 찾아온 과거의 나와 맨발로 선 현재의 최부제가 대면해 화해하는 장면의 그 쓰잘데없이 길고 긴 감정 낭비 씬들. 영화의 처음, 한국 카톨릭 교단과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촌스럽지 않게 뉘앙스로 극을 이끌고 관객을 성인 대접해줬던 공을 영화는 이 한씬으로 모조리 날려버리고야 만다. 

(각성하자 한.국.신.파.) 


그렇게 길게, 오래, 성의껏, 타임라인을 쭉쭉 늘여가며 보여주지 않아도 우린 알아요. 

얘가 두렵다는거. 이겨내고 싶어한다는거. 돌아갈 빌미를 찾는다는 것까지도.  


그리고 다시 이어진 마지막 대악령을 쫓기위한 구마의식. 

귀신들린 소녀는 어마어마한 연기 끝에 끝내 절명하고 여기서 영화는 포기가 안된 신파의 똥물을 다시 한번 투척한다.


박소담이 미친 열연으로 잡아놓은 악령의 분위기에 김윤석의 오열하는 연기가 찬물을 촤악~ 하고 끼얹는다. 푸시식~ 화면에서 김이 빠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그렇게 티나게 울지않아도 안다니까요. 

그리고 원래 그런 캐릭터도 아니잖아요. 

성숙하게 갈무리된 어른의 감정을 보여주길 바라는건 그래서 주제와 걸맞는 불가해성을 느끼길 바라는 건 오직 나만의 헛된 꿈인가요. 


영화의 마지막. 

악령의 숙주가 될 처지에 이르른 최부제는 스스로 강물로 뛰어내려 악을 처단한다. 


그리고, 소녀도 깨어나고 최부제도 강에서 살아돌아온다. 


입가엔 씨익 웃음을 얹고 8등신 뒷모습을 어둠속으로 재촉한 채 

관객에게 프리퀄적인 클리셰를 선사하며 사라진다.


To Be Continued....의 예감을. 

"최부제, 악령 쫓는 젊은 사제의 탄생" 같은 제목을 화면위에 숨긴 채로.    

     

Posted by 미와카주

영화는 시작부터 유난히 색감이 어두워서
유독 자주 눈을 찡그리며 화면을 쳐다봐야 했다.

'이런... 극장 영사기 램프가 맛이 갔나?' 하던 순간
'아 이거 지금 디지털 영사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디지털 영사면 영사기 램프하곤 아마도 상관 없지않을까)

 

생각해보면 '세븐' '패닉룸' '소셜 네트워크' '밀레니엄' 같은 데이빗 핀처 영화들은
어슴프레한 공간에서 인물이 걷고 말하고 찡그리던 장면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를 찾아줘>에서 아내가 사라져버린걸 알고는
해질 무렵의 어슴프레한 광원 속에서 멍하니 서있는
벤 에플렉의 얼굴은
마치 지금부터 데이빗 핀처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여자' 스티븐 킹이라 불리는 길리언 플린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나를 찾아줘>는
왠만한 남자 사이코패스의 두 뺨을 번갈아 치고도 한바퀴 여유롭게 남는
인상적인 여자 사이코패스를 그린다.

 

엄청난 준비성과 끈기, 그리고 순발력의 삼위일체로 무장한 영화 속 여주인공은

잘 나가다 막판에 자만에 빠져
꼭 다 된 밥에 재 뿌리고 잡혀서 망신살 뻗치는 기존의 사이코패스들에게

이 시대 진정한 사이코패시 범죄의 강령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자만하지 말라"
"준비, 실행, 수정, 그리고 다시 또 실행하라"
"어떤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말고 우겨라"

 

만약 이 영화가 그저 한낱 걸출한 사이코패스에 대한 얘기일 뿐이라면

뭐, '세븐'은 그냥 사이코 잡는 형사 이야기고
'소셜네트워크'는 그저 페이스북 창시자의 성공담에 불과했겠지.

 

그러니까 데이빗 핀처는
이 영화에서 뭔가 좀 다른 얘기가 하고싶었을거고

자연스레 내 눈길은 (감독의 의도대로)
이런 규모의 대국민 우롱 범죄를 깔끔하게 수행해내는
가냘픈 여자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에 머물렀다.

 

여자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날, 남편이 어린 여제자에게 해주던 키스는

결혼 전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우연히 설탕공장을 지나다 맞은 설탕비 속에서 했던 키스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고

이 장면은 여자의 심장에 그대로 각인되어

그녀가 꿈꾸어왔던 이상적인 결혼생활, 둘만의 관계속에서만 만들어진다 믿었던 어떤 특별함나아가 스스로의 자존감까지 그대로 쓰레기통에 쳐넣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걸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남편을 응징하기 위해

남편이 대국민 심판대에 서서
거세게 몰아붙여지다 못해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실종'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한다.

이야기가 여기서 멈춘다면야

'아,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구나'
'아내를 화나게 하지말자'는
금과옥조의 교훈과 함께 훈훈하고 섬뜩하게 마무리되었겠으나

또 한번의 범죄와 함께 이어지는 후반부의 대반전은
여자의 복수심이 단순히 남자의 변심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원하던' 남자의 모습과
여자가 '원하던' 결혼의 이상적인 모습을 지탱하지 못했던 남자의 찌질함에 대한

응징이었음을 알려준다.

 

'나는 너를 위해
니가 원하는 '쿨하고 너그러운' 여자를 필사적으로 연기하면서
이 결혼에 매달렸는데

감히 넌 게으르고 무책임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세상의 무수한 찌질한 유부남들이 답습해서 이젠 신선하지도 않은
'젊은 년이랑 붙어먹기'나 시전하고 있다 이거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를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결혼에 대한 지당도사 같은 명제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당신은 그나마 내가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던 그때가
그래도 제일 봐줄만 했어"
(그러니까 평생 겁에 질린채로 내 눈치보면서 내 옆에서 늙어 죽어)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주인공.

 

아, 나는 관계에 대해서
이만큼이나 이기적인 (그리고 속시원한) 일갈은 듣도보도 못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여주고
상대의 존재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임감있고 화목하게 이어지는 결혼생활이란
과연 현실에 존재할수 있는 꿈일까.
존재할 수 없는 꿈이라서
그렇게나 다들 결혼하면 성숙해진다고들 말하는걸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

 

여주인공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된 연유에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상대에 맞춰 자유자재로 '자아'를 연기하는데 명수였고

그런 자아로 이룩한 관계가 지루해지거나 불량품이 될 때 

관계를 끝내기 위한 방편으로 '자해' '희생자 코스프레'를 해왔던 전력이 있다. 

이번에는 그것이 '실종'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기대에 맞춰 쿨한 여자의 자아를 입고 살아왔던 그녀는

남편의 불륜으로 더이상 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하에

과거의 자아를 포함해 모든 걸 버리면서

동시에 남편도 응징할 방법으로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다.

 

그러다 강도를 당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는 TV쇼에 나온 남편의 인터뷰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깨닫는다.

 

바로 남편이야말로

"한때 문제가 있었으나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서로를 지탱하게 된 부부"의 연기를 훌륭히 수행해 줄 후보자라는 것을. 

 

이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옛 남자친구를 스토커로 몰기 위한 마지막 완벽 범죄를 저지른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는 부부.

 

그녀에게 남편이 묻는다.

"왜 서로를 증오하면서 이런 쇼를 계속해야 하는 거지?"

"그게 바로 결혼이야"

 

'진짜인 나'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사는 그녀의 연기는 계속된다.

 


Posted by 미와카주

우울증 병가를 마친 주인공의 복직 문제를 두고
사장은 다른 근로자들로 하여금
보너스와 주인공의 복직 중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구도를 짠다.

 

이런 구도 속에서
복직을 하려고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보너스를 포기해줄 것을 요청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파렴치하다는 비난을 받으며
때론 폭력사태로 번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매출의 최대화와 효율적 경영전략이라는 모토 아래
그 어느때보다 잔인한 고용축소의 칼날로 파이를 늘려놓고도
그 파이를 임금노동자와 나누지않고 자신에게만 귀속시키는 자본가,
시장의 논리라며 이를 방치하는 정부,
그리고 자신을 피해간 칼날에 안도하며 그로 인한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비난은
지금 애꿎은 여성과 이주노동자를 겨누고 있다.

 

일자리 축소와 그로 인한 생계의 두려움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때문이 아니다.

 

독일의 신나치 발흥이나
프랑스의 샤를리 엡도건으로 바라본 아랍이민들의 게토화된 실상
그리고 IS로 떠나간 한국 소년의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상태는
모두다 탓해야할 대상을 놔두고 엉뚱한 대상에 분노를 집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동료의 복직이냐 보너스냐를
선택해야만 하게 판을 짠건 사장인데
왜 동료끼리 서로를 미워해야만 하는가.

 

중요한 건 사장의 마지막 제안에 나오듯
결국 보너스도 복직도 모두 허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을 해고하지 않으면
공장이 망하거나 아님 다른이를 해고해야만 하거나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근로자를 고용한다는 건
넓은 의미에서 잠재적 소비자를 길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파이를 나누지 않으려는 자본가의 욕심을
합리적인 경영상의 결정으로만 포장하는 사회에 화를 내야한다.

이제 곧 여성도, 외국인 노동자도 아닌
기계와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잠식하는 시대가 오면
그땐 기계를 혐오하며 테러하고 때려부술건가?

 

주인공의 복직을 위한 투표는 결국 복직 실패로 결론나고

착잡한 마음으로 짐을 싸는 그녀에게

사장은 한가지 제안을 한다.

 

"당신을 다시 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신 계약직 노동자 한명을 내보내야한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계약직 노동자의 바로 그 얼굴을 떠올리며

말없이 자리에서 떠나는 주인공.

 

비록 투표를 호소하는 주말 동안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와 관객은 똑똑히 깨닫게 된다.

 

자본의 강고한 틀거리 안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연대solidarity며

연대란 결국 역지사지의 측은지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실패라는 것은

바로 이럴 때 쓰이는 말일 것이다.

  

 


Posted by 미와카주

 

사진은 사진 속 피사체가 한때 그곳에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알려줌으로써

대상의 유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매체이다.

 

유한성을 드러내는 매체로서의 강렬함은 사진에 비해 약하지만,

영화의 스크린 역시 지금 관객이 보고 있는 ‘이곳’이 아닌 예전의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른 말로 하자면 ‘촬영된’) 일들이 뒤늦게 당도한,

이른바 ‘유예된 현재 진행형‘의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야말로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다시 되살려내서 보는 행위’,

즉 ‘추억’과 ‘애도’의 본질에 가장 깊숙이 닿아있는 예술형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 ‘상실’과 ‘애도’의 플롯은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공포’ 장르까지를 아우르며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감정적 전이를 불러일으킨다.

 

‘상실’과 ‘애도’의 념(念)이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과 유사한 지점이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학문적 설명은 그러하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내가 유독 ‘상실’과 ‘애도’를 다루는 영화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지점이 있다.

 

말하자면 나란 사람은,

다신 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서 보는걸

좋아한다고 밖엔 말할 도리가 없다.

 

<래빗 홀>의 애도의 플롯은 익숙한 전개를 따른다.

 

8개월 전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젊은 부부가 있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는 살아지지 않는 나날들을 살아낸다.

 

분노와 그로 인해 외부와의 차단을 선택한 아내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들을 잃고 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주지 않았음을 원망하며, 철없는 여동생이 남의 남자친구를 뺏어 임신을 한 사실에 축하보다 경악이 먼저 앞서고, 나이 서른에 마약 과용으로 죽은 남동생과 자신의 아들을 자꾸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내세우는 친정엄마에게 진저리가 난다.

 

남편은 묵묵히 회사에 나가고 아내의 기색을 살피며, 가족을 잃은 이들의 치유모임에 아내를 데려가고, 밤마다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아들이 찍힌 휴대폰 동영상을 소리죽여 본다.

 

이들은 각자 상대의 애도의 방식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떨땐 모른척 하고 때론 격렬하게 부딪힌다.

 

아내는 어느날 차를 몰고가다 스쿨버스에 앉아있는 고등학생 남자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으며 아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까지 따라 대출하는 아내. 책의 제목은 ‘평행 우주’이다.

아이 역시 아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날 쫓아가던 아이를 놓쳐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앞에 선다.

아이는 바로, 개를 쫓아 도로로 튀어나온 여자의 아들을 차로 친 가해자였다.

 

둘은 공원 벤치에서 가끔 만남을 갖는다.

아내가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아이의 대학 입학문제, 이 세상에는 여러 버전의 내가 살고 있다는 ‘평행 우주’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여자가 묘한 눈으로 묻는다.

 

"이 세상 어딘가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한.. 또다른 내가 살고있다구?

그거... 좋구나."

 

‘평행 우주’ 이론을 모티브로 아이가 그리는 ‘래빗홀‘이라는 카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아이가 말한다.

 

“그때.. 어쩌면 제가 시속 30km보다 좀 더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싶으면 늘 계기판을 보면서 브레이크를 밟곤 했는데, 그때 31, 아니 32였을지도.. 아님 어쩌면 더 빨리 달렸을지도 몰라요.

저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괜찮아. 알아. 알아”

 

아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의 속도가 정확히 어땠고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는지 여부도 결코 알수 없었겠지만 아이의 죄책감만은 뼈저리게 느낀 여자는 아이를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우리 아이는 천국에 가서 천사가 됐을 거에요’ 하는 어느 부모의 고백에 코웃음을 치며 ‘천사가 필요하면 따로 하나 만들면 되지 왜 굳이 남의 아이를 데려간거냐’, ‘신은 새디스트’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녀가,

정작 아들을 죽게 만든 가해자의 고통을 통해 줄곧 외면해오던 애도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인간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깨닫고 성숙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상처를 덮는데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영화들이 2시간 만에 속성으로 깨우침과 화해를 전달하기 위해

성마른 엔딩을 남발하는 지금, 상처입은 사람의 멈춰버린 시간을 인내심있게 보여주는 <래빗홀>의 서사방식은 영화가 가진 소중한 결 중에 하나다.

 

Posted by 미와카주


엄마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린 올리버가 어떤 질문을 해도 유머를 섞어 시시하지 않게 대답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유쾌함이 도를 넘어 시니컬해지기 전까지는 딱 좋았다. 

 

올리버의 엄마가 미술관 관장인 올리버의 아빠가 기획한 아트 오프닝에서

예술 애호가연 하는 늙은 여자의 얼굴에 뺨을 들이밀며 자기 파괴적 광대짓을 할때

영화를 보던 나는 올리버가 되어 ‘엄마, 제발 좀~’이라고 절규하고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오래도록 목줄 매인 사람이란

원체 그렇게 당황스런 시간과 장소에서 맥락없이 폭발하기 마련인것을.

오래도록 냉담하고 예의발랐던 결혼생활 끝에 엄마가 죽고 자신과 단둘만 남은 아버지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할지도 아직 결정 못했는데 홀로 남겨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엄숙하게 커밍아웃을 한다.

 

올리버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게이 파트너를 사귄 후

지적이고 품위 있던 아버지는 올리버 보기에 온갖 부끄러운 짓을 다하고 다닌다.

 

히피같은 어린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모자라

아이처럼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클럽에 가서 하우스 뮤직에 몸을 부리고

게이 인권 모임에 나가 갑자기 게이 프라이드의 선발주자 노릇을 하려든다.

 

한때 품위 있던 아버지 주변은

이제 품위와 등진 온갖 종류의 게이들 천지다.

아버지가 시한부 선언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투약 시간을 확인하며 충실하게 곁을 지키는 올리버 대신

아버지의 눈동자는 가끔 꽃을 들고 바람처럼 찾아오는 남자 파트너에게 꽂혀있다.

 

올리버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병실을 밤새 지키며

엄습하는 불안감에도 애써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 얼굴에 혈색이 돌게 하는 파트너에게도

몸에 익은 예의로 관대하게 굴기로 마음먹는다.

 

어렵진 않다.

평생 아버지의 등을 보고 산 엄마에게 배운 익숙한 체념이다.

하지만 그는, 밑빠진 독처럼 슬프다.


‘사실 우린 모두 선의를 지닌 좋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미처 돌아보지 못한 진짜 나 자신, 보답받지 못한 채 몇십년을 바라만보는 사랑하는 이의 등, 늘 함께 하는 엄마의 공허를 보면서도 내가 그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할수 없을만큼 소심한게 또 우리죠. 그 소심함이 우리 모두를 외롭게 했어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죽고 나자, 다시 할 일이 먼지처럼 쌓인다.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짐을 정리하고 버리고 아버지의 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개에게 침실과 주방 욕실의 용도를 마치 사람에게 하듯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쓸쓸했던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홀로 남아 쓸쓸히 하면서 침대에 누워있어도 쓸쓸한 바람이 연신 등으로 파고드는 어느날 밤.

친구들의 강요로 참석한 파티에서 그는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이런 파티에 왔어요?’ 묻는 프랑스 여자에게 빠져든다. 


선의와 공허로 가득찬 집안에서 오랜 시간 외롭게 자란 올리버의 옆에

자유로운 공기를 뿌려대는 프랑스 여배우 ‘애나’가 등장하면서

잠시 올리버의 외로움이 채워지는가 싶었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정착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올리버는 그나마 아버지가 말년에 보여준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기억하며 따라해 보려 애를 쓴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질수록 애나 역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쓸쓸한 가족사를 짊어지고 있는 여자라는게 드러난다.

이 도시 저 도시의 호텔방에서 지내며 파격과 자유를 구사하던 애나와의 사랑은

애나가 처음으로 집에 올리버를 초대한 순간 판타지를 상실한 채 축 처지기 시작한다.

자신과 다를바 없는 외로운 이의 방을 본 순간, 올리버는 이 관계를 유지할 자신감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한 공간에서 서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

늘 해왔던 대로 올리버는 다시 혼자만의 방으로 숨는다.

 
태어나서 집안을 감싸던 쓸쓸한 기색부터 먼저 배운 남자.

누군가와 인생을 나누는 일에 도무지 자신이 없는 남자.

가족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함께 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행복해질거라 믿는 법을

올리버는 비기너가 되어 다시 배워갈 수 있을까.


<비기너스>는 내가 본 가장 슬프고 독특한 가족영화였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