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사진은 사진 속 피사체가 한때 그곳에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알려줌으로써

대상의 유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매체이다.

 

유한성을 드러내는 매체로서의 강렬함은 사진에 비해 약하지만,

영화의 스크린 역시 지금 관객이 보고 있는 ‘이곳’이 아닌 예전의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른 말로 하자면 ‘촬영된’) 일들이 뒤늦게 당도한,

이른바 ‘유예된 현재 진행형‘의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야말로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다시 되살려내서 보는 행위’,

즉 ‘추억’과 ‘애도’의 본질에 가장 깊숙이 닿아있는 예술형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 ‘상실’과 ‘애도’의 플롯은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공포’ 장르까지를 아우르며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감정적 전이를 불러일으킨다.

 

‘상실’과 ‘애도’의 념(念)이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과 유사한 지점이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학문적 설명은 그러하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내가 유독 ‘상실’과 ‘애도’를 다루는 영화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지점이 있다.

 

말하자면 나란 사람은,

다신 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서 보는걸

좋아한다고 밖엔 말할 도리가 없다.

 

<래빗 홀>의 애도의 플롯은 익숙한 전개를 따른다.

 

8개월 전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젊은 부부가 있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는 살아지지 않는 나날들을 살아낸다.

 

분노와 그로 인해 외부와의 차단을 선택한 아내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들을 잃고 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주지 않았음을 원망하며, 철없는 여동생이 남의 남자친구를 뺏어 임신을 한 사실에 축하보다 경악이 먼저 앞서고, 나이 서른에 마약 과용으로 죽은 남동생과 자신의 아들을 자꾸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내세우는 친정엄마에게 진저리가 난다.

 

남편은 묵묵히 회사에 나가고 아내의 기색을 살피며, 가족을 잃은 이들의 치유모임에 아내를 데려가고, 밤마다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아들이 찍힌 휴대폰 동영상을 소리죽여 본다.

 

이들은 각자 상대의 애도의 방식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떨땐 모른척 하고 때론 격렬하게 부딪힌다.

 

아내는 어느날 차를 몰고가다 스쿨버스에 앉아있는 고등학생 남자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으며 아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까지 따라 대출하는 아내. 책의 제목은 ‘평행 우주’이다.

아이 역시 아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날 쫓아가던 아이를 놓쳐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앞에 선다.

아이는 바로, 개를 쫓아 도로로 튀어나온 여자의 아들을 차로 친 가해자였다.

 

둘은 공원 벤치에서 가끔 만남을 갖는다.

아내가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아이의 대학 입학문제, 이 세상에는 여러 버전의 내가 살고 있다는 ‘평행 우주’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여자가 묘한 눈으로 묻는다.

 

"이 세상 어딘가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한.. 또다른 내가 살고있다구?

그거... 좋구나."

 

‘평행 우주’ 이론을 모티브로 아이가 그리는 ‘래빗홀‘이라는 카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아이가 말한다.

 

“그때.. 어쩌면 제가 시속 30km보다 좀 더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싶으면 늘 계기판을 보면서 브레이크를 밟곤 했는데, 그때 31, 아니 32였을지도.. 아님 어쩌면 더 빨리 달렸을지도 몰라요.

저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괜찮아. 알아. 알아”

 

아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의 속도가 정확히 어땠고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는지 여부도 결코 알수 없었겠지만 아이의 죄책감만은 뼈저리게 느낀 여자는 아이를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우리 아이는 천국에 가서 천사가 됐을 거에요’ 하는 어느 부모의 고백에 코웃음을 치며 ‘천사가 필요하면 따로 하나 만들면 되지 왜 굳이 남의 아이를 데려간거냐’, ‘신은 새디스트’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녀가,

정작 아들을 죽게 만든 가해자의 고통을 통해 줄곧 외면해오던 애도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인간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깨닫고 성숙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상처를 덮는데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영화들이 2시간 만에 속성으로 깨우침과 화해를 전달하기 위해

성마른 엔딩을 남발하는 지금, 상처입은 사람의 멈춰버린 시간을 인내심있게 보여주는 <래빗홀>의 서사방식은 영화가 가진 소중한 결 중에 하나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