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엄마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린 올리버가 어떤 질문을 해도 유머를 섞어 시시하지 않게 대답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유쾌함이 도를 넘어 시니컬해지기 전까지는 딱 좋았다. 

 

올리버의 엄마가 미술관 관장인 올리버의 아빠가 기획한 아트 오프닝에서

예술 애호가연 하는 늙은 여자의 얼굴에 뺨을 들이밀며 자기 파괴적 광대짓을 할때

영화를 보던 나는 올리버가 되어 ‘엄마, 제발 좀~’이라고 절규하고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오래도록 목줄 매인 사람이란

원체 그렇게 당황스런 시간과 장소에서 맥락없이 폭발하기 마련인것을.

오래도록 냉담하고 예의발랐던 결혼생활 끝에 엄마가 죽고 자신과 단둘만 남은 아버지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할지도 아직 결정 못했는데 홀로 남겨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엄숙하게 커밍아웃을 한다.

 

올리버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게이 파트너를 사귄 후

지적이고 품위 있던 아버지는 올리버 보기에 온갖 부끄러운 짓을 다하고 다닌다.

 

히피같은 어린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모자라

아이처럼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클럽에 가서 하우스 뮤직에 몸을 부리고

게이 인권 모임에 나가 갑자기 게이 프라이드의 선발주자 노릇을 하려든다.

 

한때 품위 있던 아버지 주변은

이제 품위와 등진 온갖 종류의 게이들 천지다.

아버지가 시한부 선언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투약 시간을 확인하며 충실하게 곁을 지키는 올리버 대신

아버지의 눈동자는 가끔 꽃을 들고 바람처럼 찾아오는 남자 파트너에게 꽂혀있다.

 

올리버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병실을 밤새 지키며

엄습하는 불안감에도 애써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 얼굴에 혈색이 돌게 하는 파트너에게도

몸에 익은 예의로 관대하게 굴기로 마음먹는다.

 

어렵진 않다.

평생 아버지의 등을 보고 산 엄마에게 배운 익숙한 체념이다.

하지만 그는, 밑빠진 독처럼 슬프다.


‘사실 우린 모두 선의를 지닌 좋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미처 돌아보지 못한 진짜 나 자신, 보답받지 못한 채 몇십년을 바라만보는 사랑하는 이의 등, 늘 함께 하는 엄마의 공허를 보면서도 내가 그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할수 없을만큼 소심한게 또 우리죠. 그 소심함이 우리 모두를 외롭게 했어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죽고 나자, 다시 할 일이 먼지처럼 쌓인다.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짐을 정리하고 버리고 아버지의 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개에게 침실과 주방 욕실의 용도를 마치 사람에게 하듯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쓸쓸했던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홀로 남아 쓸쓸히 하면서 침대에 누워있어도 쓸쓸한 바람이 연신 등으로 파고드는 어느날 밤.

친구들의 강요로 참석한 파티에서 그는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이런 파티에 왔어요?’ 묻는 프랑스 여자에게 빠져든다. 


선의와 공허로 가득찬 집안에서 오랜 시간 외롭게 자란 올리버의 옆에

자유로운 공기를 뿌려대는 프랑스 여배우 ‘애나’가 등장하면서

잠시 올리버의 외로움이 채워지는가 싶었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정착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올리버는 그나마 아버지가 말년에 보여준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기억하며 따라해 보려 애를 쓴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질수록 애나 역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쓸쓸한 가족사를 짊어지고 있는 여자라는게 드러난다.

이 도시 저 도시의 호텔방에서 지내며 파격과 자유를 구사하던 애나와의 사랑은

애나가 처음으로 집에 올리버를 초대한 순간 판타지를 상실한 채 축 처지기 시작한다.

자신과 다를바 없는 외로운 이의 방을 본 순간, 올리버는 이 관계를 유지할 자신감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한 공간에서 서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

늘 해왔던 대로 올리버는 다시 혼자만의 방으로 숨는다.

 
태어나서 집안을 감싸던 쓸쓸한 기색부터 먼저 배운 남자.

누군가와 인생을 나누는 일에 도무지 자신이 없는 남자.

가족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함께 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행복해질거라 믿는 법을

올리버는 비기너가 되어 다시 배워갈 수 있을까.


<비기너스>는 내가 본 가장 슬프고 독특한 가족영화였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