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영화는 시작부터 유난히 색감이 어두워서
유독 자주 눈을 찡그리며 화면을 쳐다봐야 했다.

'이런... 극장 영사기 램프가 맛이 갔나?' 하던 순간
'아 이거 지금 디지털 영사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디지털 영사면 영사기 램프하곤 아마도 상관 없지않을까)

 

생각해보면 '세븐' '패닉룸' '소셜 네트워크' '밀레니엄' 같은 데이빗 핀처 영화들은
어슴프레한 공간에서 인물이 걷고 말하고 찡그리던 장면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를 찾아줘>에서 아내가 사라져버린걸 알고는
해질 무렵의 어슴프레한 광원 속에서 멍하니 서있는
벤 에플렉의 얼굴은
마치 지금부터 데이빗 핀처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여자' 스티븐 킹이라 불리는 길리언 플린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나를 찾아줘>는
왠만한 남자 사이코패스의 두 뺨을 번갈아 치고도 한바퀴 여유롭게 남는
인상적인 여자 사이코패스를 그린다.

 

엄청난 준비성과 끈기, 그리고 순발력의 삼위일체로 무장한 영화 속 여주인공은

잘 나가다 막판에 자만에 빠져
꼭 다 된 밥에 재 뿌리고 잡혀서 망신살 뻗치는 기존의 사이코패스들에게

이 시대 진정한 사이코패시 범죄의 강령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자만하지 말라"
"준비, 실행, 수정, 그리고 다시 또 실행하라"
"어떤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말고 우겨라"

 

만약 이 영화가 그저 한낱 걸출한 사이코패스에 대한 얘기일 뿐이라면

뭐, '세븐'은 그냥 사이코 잡는 형사 이야기고
'소셜네트워크'는 그저 페이스북 창시자의 성공담에 불과했겠지.

 

그러니까 데이빗 핀처는
이 영화에서 뭔가 좀 다른 얘기가 하고싶었을거고

자연스레 내 눈길은 (감독의 의도대로)
이런 규모의 대국민 우롱 범죄를 깔끔하게 수행해내는
가냘픈 여자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에 머물렀다.

 

여자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날, 남편이 어린 여제자에게 해주던 키스는

결혼 전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우연히 설탕공장을 지나다 맞은 설탕비 속에서 했던 키스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고

이 장면은 여자의 심장에 그대로 각인되어

그녀가 꿈꾸어왔던 이상적인 결혼생활, 둘만의 관계속에서만 만들어진다 믿었던 어떤 특별함나아가 스스로의 자존감까지 그대로 쓰레기통에 쳐넣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걸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남편을 응징하기 위해

남편이 대국민 심판대에 서서
거세게 몰아붙여지다 못해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실종'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한다.

이야기가 여기서 멈춘다면야

'아,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구나'
'아내를 화나게 하지말자'는
금과옥조의 교훈과 함께 훈훈하고 섬뜩하게 마무리되었겠으나

또 한번의 범죄와 함께 이어지는 후반부의 대반전은
여자의 복수심이 단순히 남자의 변심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원하던' 남자의 모습과
여자가 '원하던' 결혼의 이상적인 모습을 지탱하지 못했던 남자의 찌질함에 대한

응징이었음을 알려준다.

 

'나는 너를 위해
니가 원하는 '쿨하고 너그러운' 여자를 필사적으로 연기하면서
이 결혼에 매달렸는데

감히 넌 게으르고 무책임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세상의 무수한 찌질한 유부남들이 답습해서 이젠 신선하지도 않은
'젊은 년이랑 붙어먹기'나 시전하고 있다 이거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를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결혼에 대한 지당도사 같은 명제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당신은 그나마 내가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던 그때가
그래도 제일 봐줄만 했어"
(그러니까 평생 겁에 질린채로 내 눈치보면서 내 옆에서 늙어 죽어)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주인공.

 

아, 나는 관계에 대해서
이만큼이나 이기적인 (그리고 속시원한) 일갈은 듣도보도 못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여주고
상대의 존재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임감있고 화목하게 이어지는 결혼생활이란
과연 현실에 존재할수 있는 꿈일까.
존재할 수 없는 꿈이라서
그렇게나 다들 결혼하면 성숙해진다고들 말하는걸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

 

여주인공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된 연유에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상대에 맞춰 자유자재로 '자아'를 연기하는데 명수였고

그런 자아로 이룩한 관계가 지루해지거나 불량품이 될 때 

관계를 끝내기 위한 방편으로 '자해' '희생자 코스프레'를 해왔던 전력이 있다. 

이번에는 그것이 '실종'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기대에 맞춰 쿨한 여자의 자아를 입고 살아왔던 그녀는

남편의 불륜으로 더이상 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하에

과거의 자아를 포함해 모든 걸 버리면서

동시에 남편도 응징할 방법으로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다.

 

그러다 강도를 당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는 TV쇼에 나온 남편의 인터뷰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깨닫는다.

 

바로 남편이야말로

"한때 문제가 있었으나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서로를 지탱하게 된 부부"의 연기를 훌륭히 수행해 줄 후보자라는 것을. 

 

이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옛 남자친구를 스토커로 몰기 위한 마지막 완벽 범죄를 저지른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는 부부.

 

그녀에게 남편이 묻는다.

"왜 서로를 증오하면서 이런 쇼를 계속해야 하는 거지?"

"그게 바로 결혼이야"

 

'진짜인 나'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사는 그녀의 연기는 계속된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