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독극물에 마비된 채로 죽은 두 남자. 

그 와중에 자기 말마따나 XX는 지킨 백작.

<아가씨>의 나쁜놈들 응징 장면을 본 지인이 “다 좋은데 나쁜 놈들에게 너무 고상한 죽음을 선사했다”며 어쩜 그게 나쁜놈들과 동성을 지닌 ‘남자’ 감독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두 여자의 인생을 망치고, 그 중 한 여자를 죽게하고, 또 다른 여자의 인생까지 망치려 했던 쳐죽일 짓을 왜 그리 별거 아닌 것처럼 처리한건지. “물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런 어리석은 짓꺼리를 하는게 결국 인간”이라고 퉁치는 듯한 희화화된 결말에 심히 기분이 나빴다고 말이다. 


스스로 손에 가위를 박고 배에 못을 내려치는 <비밀은 없다>의 장면들은 여자감독의 작품이면서도 어딘가 박찬욱스러운데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엔딩에서 연홍(손예진 분)이 종찬(김주혁 분)을 응징하는 방식을 보고나면, 영화가 박찬욱스러운 것은 단지 어떤 스타일에 불과할 뿐 그 본질은 매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머리도 좋지않고 눈치도 없는 엄마 연홍. 남편 종찬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첫 날, 딸 민진이 실종된다. 경찰도 남편도 남편의 선거 캠프도 일단 사태의 추이를 ‘이성적으로’ 지켜보자고 한다. 그런데 이쁜거 빼곤 그닥 볼 거 없어보이는 이 여자는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순하지 않다. 딸의 실종에 정신 못차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어디든 찾아가서 되는대로 헤집어놓고 히스테리를 부린다. 한 마디로 요령없이 일직선으로 사건을 파고든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끔찍한 진실 앞에서 연홍은 그야말로 온 몸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테리를 못 이겨 복수를 망치지도 않는다. 분노의 삽질과 비닐 졸라매기로 남편을 죽음 목전에 이르게 해놓고는, 마지막 순간 남편의 숨구멍을 풀어주며 이를 갈듯 말한다. 


“여기서 너를 죽이면 내가 지는거야. 끝까지 살아 봐.” 


모든 사건의 출발이자 목표였던 남편의 선거 승리에 똥물을 뿌리며 남편을 사회적으로 살인하는, 그야말로 분노에 걸맞는 복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적으로’ 행한다.


보통 이런 식의 이야기에는 갈 수 있는 전형적인 몇가지 길이 있다. 연홍이 진실을 견디지 못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남편을 죽이거나. 만약 자신과 딸의 인생을 똥구덩이에 처박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선거에 눈 멀어 딸을 살인청부한 남편을 죽이는 것으로 연홍이 복수를 완성했다면, 남편의 죄는 죽음 그 자체로 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치지도 죽이지도 않고, 섹스비디오를 상대 후보 홈피에 올려 남편이 가장 원했던 승리를 눈앞에서 짓밟고 거기다 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가진 채로 평생 ‘살아가게’ 만든 연홍의 복수는 현실에서건 영화에서건 우리가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죄의 무게를 그대로 지게하는 복수’라는 복수의 이상향을 목격하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불편하다면 정확히 이 반대 지점에서일거다.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연홍이 차라리 종찬을 죽였다면, 그랬다면 둘 다 공평하게 주고 받은걸로 치고 ‘결함없는 인간은 없다’는 익숙한 윤리적 면죄부를 종찬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 연홍이 미쳐버리고 종찬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통에 홀로 몸부림치는 결말이었다면, ‘원래 세상은 부조리해’라는 체념을 뱉으면서도 어쩐지 삶을 고차원적으로 통찰한 것 같은 허위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어떤 면죄부도 허위 의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봐라. 니가 죄의식조차 없이 저지른 짓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었는지” 일갈하며 착실히 죄값을 치르게 한다. 또한 살인에 살인으로 응하지 않고 자기가 저지른 일만 딱 그대로 세상에 고백하는 결말 때문에, 종찬의 불륜을 그리 죽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일말의 반박거리마저 앗아간다. 얼마나 숨이 막히겠나.       


이 영화가 불편하다는 또다른 측에서는 스릴러 장르의 익숙한 장치에 기대지 않은 색다른 연출적 시도들을 그 이유로 든다. 

  

다소 방만할 정도로 반복되는 주제 선율(leitmotif). 

추리와 혼란을 동시에 야기시키는 디제틱 사운드와 논디제틱 사운드의 혼용. 회상 및 진술 장면에서 익숙한 플래시백 대신 사용되는 CG 처리된 프리즈 화면.   

피가 튄 미옥의 교복을 대신 입은 아이의 단추가 툭 하고 터지자 “넌 왜 그렇게 교복을 타이트하게 입니? 그게 스타일이니?”하는 연홍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단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대목마저 의도적으로 코믹 릴리프처럼 처리하는 방식. 


연출적으로 낯선 시도는 그것이 서사에 찰떡처럼 달라붙을 때에야 비로소 호응을 얻는다. 개인적으로 소녀들의 우정과 감수성을 표현한 시퀀스는 감독 특유의 색깔이 서사에 개성을 입힌다고 느껴졌지만, 그밖의 시도들은 좀 더 친절한 표현법을 고민해봤어도 좋았을거란 생각이다.


마지막 장면. 

“우리 딸이 지 엄마는 좋다 하디?”하는 연홍의 질문에 딸의 친구는 “엄마는 너무 멍청해서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딸의 말을 전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순히 ‘모성애’를 알리바이로 삼는 복수극이 아니라, 한 가족 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모녀가 서로의 고통에 처절히 분노하고 그 분노를 지지대 삼아 서로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녀들과 모녀 사이의 유대가 영화의 강력한 테마로 작용하는 반면, 정치판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유대는 음험하고 얄팍하기 그지없다. <아가씨>에 이어 <비밀은 없다>가 올해의 여성연대 2탄쯤으로 환호받는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일부분 박찬욱스럽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다. 특히 올해의 박찬욱 작품인 <아가씨>와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아가씨>에서 여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분노가 이른바 ‘뒤통수 때리는 탈출의 경쾌함’ 속에 희석되어버렸다면, <비밀은 없다>의 모녀는 있는 힘껏 분노를 발산하되 그 분노로 복수를 망치지도 않는다. 기쁨은 덜하지만 좀 더 정의롭다고 할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미련하거나 혹은 미련이 많아서 제대로 된 복수도 못한 채 ‘부조리한 삶’에 강제적으로 적응하는 여자들이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스크린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