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8, 90년대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었다가 IMF로 버블이 꺼지면서 직격탄을 맞은 부모는 잠실의 아파트에서 밀려나 옆 동네 월세 빌라에 살면서도 부동산 버블 시대에 대한 향수와 인생 역전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부모를 지켜보는 감독의 카메라는 그들의 부동산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뒤쫓는다. 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과 부동산 열기는 그대로 베이비 붐 세대의 욕망이 되었고, 베이비 붐 세대인 감독의 부모 역시 화학 공장에서 일하다 집 장사에 눈을 떠 시대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건설과 개발, ‘하면 된다’로 요약되는 시대는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시대에 자리를 내줬고, 그렇게 바뀐 시대의 수레바퀴 아래서 감독의 부모를 비롯한 수많은 개미 민중들이 깔려 죽었다. 이 영화는 게임에서 언제나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바로 그 ‘개미’들에 대한 이야기다. 

<버블 패밀리>[각주:1]의 감독은 부동산 호황기에 ‘집 장사’를 통해 중산층으로 올라선 부모 아래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외동딸이다. 그 딸이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씁쓸한 경제적 몰락 위에 서 있는 부모님의 오늘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적 다큐멘터리의 여러 갈래 안에서도 가족 다큐는 한국적 가족 관계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상당히 껄끄러운 작업이다. 또한 가족의 내밀한 사연을 익명의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기에 복잡한 각오를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 다큐라는 미션을 수행하는 이들은 부모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촬영 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끝나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미움이든 포용이든 말이다. 그래야만 갈등의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객관적인 마음의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조금 이상하다. 부모의 가장 추레하고 비참한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모를 의식하고 마음 쓰는 감독이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살림살이에도 끝까지 부동산 한 방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를, 때론 어이없는 헛웃음으로 대하다가도 곧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기도 한다. 평가하고 해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가 결국은 그 과정에서 부모의 삶의 궤적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영화의 마지막, 엄마가 빚까지 져가며 딸의 이름으로 사둔 임야를 바라보며 감독은 중얼거린다. “이 땅 때문에 빚을 져야했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만 같다.” 감독 자신 역시 부모로부터 환경과 습성과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을 그래서 스스로도 자기 영화의 대상인 부모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씁쓸하게 인정하는 창작자의 태도에 뭔가 신뢰가 갔다면 이상한 얘기인 걸까. 

이 영화는 감독의 가족사를 통해 근현대 한국이라는 공간에 개입해 들어온 자본주의의 문제 즉 지정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한국의 중산층이 87년 절차적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90년대 소비 자유주의시대, 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어떻게 비상하다 추락했는지를, 우리는 부동산의 몰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게임에서 정보와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개미들은 언제라도 치명타를 맞고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영화는 증언한다. 부동산 몰락이 베이비 붐 세대 생애사의 한 챕터였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생애사에는 또 다른 형태의 몰락이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은 2017.06.15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다큐멘터리 초이스에 실려있습니다.

  1. 감독 마민지, 2017 [본문으로]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