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K팝 투표문화의 명암>


 


K팝 팬문화를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것들 중에 단체 응원구호, 가수 홍보를 위한 국내 및 해외 광고판 계약, 그리고 열정적인 투표 화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투표 화력’이라는게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가수의 기록을 곧 팬인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팬 문화가 존재한다. 좀 더 산업적으로 접근하면, 군대와 나이 그리고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아이돌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한국 가요계에서 기록은 곧 아이돌의 위상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척도가 되곤 한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 투표에 대한 무한 경쟁이 국내 시상식들에 의해 손쉬운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투표 앱을 살펴보면 인기 투표에 필요한 투표권을 얻기 위해선 30초짜리 광고를 보거나, 게임이나 미심쩍은 금융 앱을 다운받아야 한다. 이도 저도 다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유료 투표권 즉 돈을 주고 투표권을 사는 옵션도 있다. 



처음엔 다들 차분히 광고를 보고 얻은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막판 순위 경쟁이 치열해지면 팬덤 대부분이 울며 겨자먹기로 현질(유료 투표권을 사는 행위)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인기상은 종종 누가 더 많은 현금을 지르는가로 결정되곤 한다. 그럼 팬들이 유료 옵션을 거부하면 되지 왜 돈을 내고 호구 인증을 하나 싶겠지만, 승부가 박빙을 달릴 때 유료투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몇시간 후 마감되는 투표가 불과 몇백표 차이로 지고 있다 생각해보라. 이제껏 해온 투표가 아까워서라도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유료 투표권을 사게 되는게 사람 심리다. 



유료 투표 옵션은 바로 이런 팬심을 악용해 일부 국내 시상식들이 자행하는 꼼수다. 아직까지 외국 시상식에서 한번도 유료 투표 옵션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대체 국내 시상식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시스템을 공공연하게 운용하는지, 또 이 문제에 제대로 칼을 대는 언론사는 왜 없는건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해마다 시상식 철만 되면 은근슬쩍 유료 투표 옵션을 집어넣는 국내 시상식의 행태는 아이돌 시장 생태계를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아이돌 팬덤 대부분이 십대로 구성된 상황에서 소비자 권리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어려운 미성년 아이돌 팬을 현금지급기 취급하는 도덕적 해이를 드러낸다. 



한편 K팝이 한류로 인기를 끌다보니 국내 시상식에도 ‘한류 인기상’처럼 외국팬들이 직접 투표하는 부문이 생겨났다. 이런 한류 인기상은 당연히 100% 외국팬들에 의해 결정된다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해외 팬덤이 크지 않은 팬덤은 국내팬들이 VPN(Virtual Private Network)으로 IP를 우회해 해외용 투표앱을 깔아 투표하는게 부지기수다. 어떻게든 자기 가수에게 상 하나라도 더 안겨주고 싶은 팬들이 고안해낸 일종의 변칙 투표인 셈인데 국내 시상식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는 걸로 보인다. 



상이란게 그 이름이 갖는 의미에 걸맞는 후보에게 주려고 만들어진 것인데, 한류 인기상이 국내 인기상이나 다를바 없어지는 사태가 해마다 되풀이된다. 팬들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쉽게 편법을 일삼는 태도를 버려야겠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건 기준을 확실히 하지않는 시상식 측의 태도다. 



외국 시상식 경우엔 매크로 등 편법적 투표 행위가 발각될 시 후보자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 아예 투표 공지에 박혀있다.  



- 아이하트 라디오 시상식 투표규정




투표는 아니지만, 작년 보이밴드 원디렉션 출신 해리 스타일스 팬들이 VPN을 써서 미국 IP로 스트리밍을 하다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빌보드 메인 차트는 본래 미국내 사용자들의 구매와 스트리밍만 성적에 반영하는데, 미국 외 국가의 팬들이 스타일스 신곡을 차트에 올리기 위해 VPN을 통해 미국 IP를 만들어 집단적으로 스트리밍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이 기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팬들의 이런 행위는 차트 조작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빌보드 차트에 정보를 제공하는 닐슨 측은 “우리는 VPN을 봉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면서 VPN 사용 등 편법에 강력히 대처함을 시사했다. 



- <The Verge> 2017.5.5





팬덤 화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게 투표다 보니, 시상식 투표는 이렇게 종종 현질, IP 우회 등이 난무하는 과열 양상에 쉽게 빠져든다. 그러나 철없고 부화뇌동하기 쉬운 어린 팬들의 행동이라 단순 폄하하기엔 그 속내는 훨씬 복잡하다. 



아이돌 음악 시장은 일반 대중이 아닌 팬덤에 의해 굴러가다시피 하는 곳이다. 앨범을 사고, 음원을 스트리밍하고, 공연을 보고, 굿즈를 사는 팬덤의 규모와 구매력이 바로 아이돌 가수의 수명을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투표로 가수에게 상 하나라도 더 안겨주고 그에 대한 기사 한줄이라도 더 나오게 해서,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주고 싶어하는 팬들의 마음만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순전한 애정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국내 시상식들의 상도덕 부재다. 



유료 옵션을 폐지하고 투표 기준을 엄격하게 세우는 것만이 스스로의 공신력을 높이는 방법임을 국내 시상식들이 이제라도 깨닫길 바란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