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2018.6.12 발행된 시사IN에 기고한 글입니다. 


방탄을 두고 'K팝이다' '아니 K팝이 아니라 BTS팝이다' 하는 논쟁이 있어온 지도 꽤 됐죠.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그걸 뛰어넘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방탄 역시 K팝의 정체성을 가진 동시에 이를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지점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K팝이면서 K팝이 아닌거죠. 그런 경우에 '포스트' 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알맞은 수식어라고 봅니다. 


(기사링크)





방탄소년단이 포스트 케이팝인 이유

 


“BTS 콘서트에 참석한 다른 아티스트들 모습 잘 봤다”

“살면서 다 큰 성인들이 그렇게 소리지르는 모습은 난생 처음 봤다”   

“아시안 인베이젼! 뉴 비틀즈의 탄생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시상식에 등장한 지난 (미국 현지시간) 20일, 현지인들이 SNS에 남긴 말이다. 현지 미디어는 이제라도 BTS 열풍에 합류해야하나 조바심을 냈고, R&B 가수 갈란트와 모델 출신 방송인 타이라 뱅크스 같은 셀럽들은 “다양성의 관점에서 볼 때 BTS는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현상”이라며 거듭 강력한 지지를 표현했다. 빌보드 공연 이틀 전 발매된 정규 앨범은, 이 글을 쓰는 현재 한국가수 최초로 메인 앨범차트인 빌보드 200 1위 데뷔를 바라보고 있다. 확실히 방탄소년단의 정규 3집 컴백과 함께 펼쳐진 이런 현상은 유의미한 변화의 시그널을 보낸다. 빌보드 시상식이나 엘렌쇼에서 방탄을 소개할 때면 “세계 최고의 보이밴드”라는 수식어가 여지없이 따라붙었다. 피치포크와 롤링 스톤 등 유력 음악지는 새 앨범에 대해 진지한 평과 함께 준수한 평점을 매겼다. 애플 뮤직 에디터는 앨범 프로필에 “케이팝의 경계를 부순 그룹”이라는 소개를 썼다. 아시아, 케이팝, 아이돌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수식어가 아니다. 


한편, 국내 언론의 경우는 케이팝 아이돌이 주류 음악시장에서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좀더 고무된 모습이다. 기사 제목에 ‘점령’ ‘정복’ 같은 단어가 유독 눈에 띄고 기자회견에서도 빌보드 차트 1위 가능성을 집요하게 묻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케이팝의 세계화’라는 국가주도 한류의 그림자를 다 떨쳐내지 못한 듯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방탄소년단을 둘러싼 지금의 현상은 정말 케이팝이 세계에 인정받은 결과인걸까? 


케이팝은 일반적으로 한국 가수 전체가 아니라 랩과 보컬,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한국 아이돌 음악을 카테고리화 하는 용어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팬덤 문화 역시 케이팝을 정의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다. 십대를 위주로 한 팬층, 노래에 따른 집단적 응원구호, 자신의 가수를 기죽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조공문화, 전세계 그 어느 팬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투표화력, 홈마/팬캠/출근길사진/공항사진으로 대변되는 B컷문화, 사생팬 등이 그것이다. 방탄 역시 이런 케이팝 토양에서 탄생한 그룹이며, 그로부터 받은 수혜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온 지 이틀밖에 안된 <Fake Love>가 빌보드에서 떼창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획사가 노래 발표와 함께 ‘응원법’을 동시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케이팝 가수의 개별적 퍼포먼스는 노래를 방해하지 않는 팬들의 적절한 응원구호와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케이팝이 비록 글로벌한 서브컬쳐의 지위에 올랐을지언정 아직까지 국내외 주류 음악시장에서 진지한 음악으로 대접받지 못한 이유 역시 선명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십대 팬층의 구미에 맞춰 기획사가 만들어낸 공장형 아이돌이라는 점이다. 팬덤의 규모와 충성도에 따라 아이돌 수명이 결정되는 현재의 무한경쟁 시스템 안에서 케이팝 아이돌은 음악만큼이나 중요한 일, 즉 팬들에게 ‘기쁨’을 주는 활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 아티스트들이 앨범을 내면 곧바로 월드 투어에 돌입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소위 ‘활동기간’ 동안 음악 순위방송과 팬사인회, 팬미팅, 예능, 인터뷰 같은 루틴을 숨막히게 감당해야한다. 


방탄 역시 이런 케이팝 루틴을 대부분 수행해왔다. 뭔가 한 끗 다르다 느꼈다면, 그건 그들이 음악적 완성도를 최우선 순위로 둔다는 사실일 것이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멤버들이 거의 전곡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방탄 새 앨범 CD를 스피커로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음악 전문가가 아니라 기술적 평은 할 수 없지만, 쎈 음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데도 마냥 귀를 때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풍성한 느낌을 준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보편적인 케이팝 앨범 후반작업의 수준을 뛰어넘어 레코딩과 믹싱 완성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방탄이 케이팝의 어떤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들의 팬덤 아미(A.R.M.Y.)의 양상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국내 포털의 방탄 기사에 달린 댓글은 이미 삼,사십대가 점령한지 오래다. 이번 앨범 타이틀곡의 음원사이트 리스너 통계 역시 이,삼십대가 10대를 앞서고 있다. 해외 팬덤도 마찬가지다. 한 방탄 해외 팬베이스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즉 이십대가 팬 비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트위터의 #BTSisNotYourAverageBoyBand (“방탄은 당신이 생각하는 보통의 보이밴드가 아니다”) 라는 해시태그를 들어가보면, 10대부터 60대까지 방탄의 음악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는지, 어떻게 자신을 구원했는지 절절하게 고백하는 글로 넘쳐난다. 이번 빌보드를 위해 입국한 LA 공항에서 팬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방탄을 상징하는) 보라색 리본을 묶고 일렬로 늘어서 방탄의 입국길을 안전하게 지켜준 #PurpleRibbonArmy 프로젝트는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마저 “믿기 힘든 일”이라며 감탄하게 했다. 우울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는 팬들을 위해 세계 각국 언어로 위로를 전하는 심리전공자들의 모임(@BTS_AHC), 일회성이 아니라 시리아 등 세계의 고통받는 곳에 꾸준히 아미의 이름으로 기부를 실천하는 단체(@OneinAnArmy)도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방탄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고, 미약하나마 이를 되갚아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이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아이돌 팬이라고 생각했던 집단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건, 방탄의 새 앨범이 빌보드 200 차트에서 미국 힙합 가수 포스트 말론과 치열하게 경쟁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SNS의 외국 팝가수 팬들 그중에서도 흑인팬들이 주축이 되어 방탄 신곡을 집단 스트리밍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StreamFakeLoveToEndTrumpsAmerica) 한마디로, 유색인종이 ‘트럼프의 징후’인 포스트 말론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거다. 이는 트럼프의 미국이 상징하는 징후적 음악이 득세하는 현재의 미국 음악계에서 방탄이 이를 깨뜨릴 유의미한 카운터파트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 이게 만약 다른 케이팝 그룹이었다면 조금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알다시피, 케이팝 내부의 인종주의적 혐의는 심각한 수준이다. 개인기라며 흑인 영어를 흉내낸다거나, 흑인 힙합에 대한 섬세한 문화적 이해없이 오로지 거기서 스웨그만을 취하는 등 케이팝 씬의 인종주의에 대한 무지는 해외팬들의 격분을 초래할 정도로 심각하다. 초창기에는 방탄도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해외팬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자 여기에 대한 솔직하고 구체적인 사과와 함께 확연한 자기 성찰이 뒤따랐다. 자신의 무지와 경솔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에 대해 호의적인 해외 문화권 특성에 힘입어, 팬덤 내부의 결속은 물론 방탄은 이전보다 더 크고 다양한 팬층을 흡수해 나갔다. ‘실수를 통해 배워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몸소 증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방탄소년단은 케이팝의 토양 위에 서있지만 동시에 이를 성큼성큼 뛰어넘는 중이다. 우울증과 정신건강, 한국에서 특히 터부시되는 주제를 음악을 통해 서슴없이 말하며 그래도 “넌 혼자 걷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방탄에 대해 전세계 팬들이 느끼는 애착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방탄을 두고 “피곤한 얼굴. 어쩐지 나와 닮은 듯한 그늘. 우리 같이 살아내고 있다고. 천천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가자 말하는. 목적과 목표만 중요했던 날들의 끝과 함께 찾아온 우리의 아이콘”이라 말하는 어느 팬의 말은 그들에게 받는 위로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니 달콤하고 화려한 포장으로 일시적 탈출구를 제공해주던 케이팝을 벗어나 밀레니얼 세대의 맨얼굴이자 롤모델로 받아들여지는 방탄을 두고 포스트 케이팝이라 부르는 것은 결코 과한 시도가 아니다. 


케이팝에서 태어났으나 개별적인 아티스트리와 영향력으로 자신들만의 독보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방탄소년단. 바라는 게 있다면, 국내 언론이 마치 올림픽 금메달 중계하듯 이들의 차트 성과만 조명하지 말고, ‘밀레니얼 세대의 맨 얼굴’로서 이들이 갖는 동시대적 의미에 대해 좀 더 준비된 비평으로 접근해주길 바란다. 또한 아티스트로서 이들이 갖는 잠재력이 충분한 여유를 갖고 펼쳐질 수 있도록 이제 케이팝 산업계의 소모적 루틴도 조금은 변할 때가 되지않았나 생각한다.  


Posted by 미와카주

*이 글은 문화/과학 2017년 여름호(통권 제90호, 2017.5)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연애드라마 왕국에 끼어든 판타지


흔히, 한국 드라마는 ‘기-승-전-연애’라고들 한다. 법정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회사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가 보여주는 지나친 멜로 편향을 두고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다. 극의 소재 와 주인공이 가진 직업군이 다를 뿐 결국 달려가는 곳은 ‘ 연애의 완성’이라는 골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순전히 로맨스 구도를 위해 들러리처럼 동원된 드라마 속 배경의 부실한 재현에 대한 조롱도 포함된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 한국 드라마의 이런 멜로 편향적 구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그간 이른바 ‘한국 드라마’라는 것은 <수사반장> <전설의 고향> 등 일부 장르 드라마를 제외한 대부분이 가족과 로맨스를 중심에 놓고 공전하는, 지루하지만 평화로운 은하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OCN, tvN 등 케이블 방송사와 JTBC를 주축으로 한 종편 채널이 있었다. 후발주자로서의 난점을 극복하고 공중파와 차별을 두기 위해, 또한 외국 드라마의 유입으로 높아진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이들은 장르물 드라마에 눈을 돌렸다. 


1995년 영화전문 채널 DCN에서 이름을 바꾸어 1999년 재출범한 OCN은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오리지널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키드갱>(2007), <조선추리활극 정약용>(2009), <신의 퀴즈>(2010), < 특수사건 전담반 TEN>(2011), <뱀파이어 검사>(2011) 등의 장르드라마가 이 시기에 제작됐다. 2006년 개국한 tvN 역시 자체 제작 드라마의 활로를 장르물에서 찾았으며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2013), <갑동이>(2014), <시그널>(2016) 같은 성공작을 만들어냈다. 2011년 개국한 종합편성채널인 JTBC도 감염 재난극인 <세계의 끝>(2013), 조직범죄극 <무정도시>(2013), 추리극인 <선암여고 탐정단>(2014), 메디컬 재난극 <디데이>(2015) 등 본격 장르드라마를 쏟아냈다. 본격 장르물을 부담스러워하던 지상파 채널들은 ‘러브 라인’이 없다고 자신들이 고사했던 장르물이 케이블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기존의 보수적 전략을 조금씩 회수하기 시작했다. 지상파의 장르 확장 움직임은 2010년 경부터 조금씩 가시화된다.


2010~13년에 방영된 지상파 TV 드라마를 분석한 연구[각주:1]에 따르면, 해당 기간 동안 방송 3사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는 총 209편이었으며 의학, 역사, 가족, 정치, 요리, 법정물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 209편에 대해 이 드라마의 장르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묻는 질문에는 멜로 내지 로맨틱 코미디라는 답이 높은 비율로 1위를 차지했다. 소재를 다양화했을 뿐이지 결국 서사는 멜로 안에서 맴돌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TV 드라마는 남성 시청자에 비해 재택 시간이 많고 좀 더 열광적인 팬덤을 형성하는 여성 시청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인식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라는 ‘관계 판타지’가 여전히 드라마 제작에서 가장 강세를 보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판타지 장르의 약진이다. 위 연구에서 드라마 장르 구분에 대한 시청자의 응답 중 판타지물은 멜로/로맨틱 코메디, 스릴러/미스터리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더구나 2위인 스릴러/미스터리와 거의 동률을 형성할 정도였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액션, 공포, 코미디 순이었다. 이처럼 TV 드라마에서 액션이나 공포, 코미디 같은 전통 적으로 익숙한 장르보다 판타지물의 비율이 더 높아진 것은, 영화보다 조금 더 보수적으로 흘러가는 TV 드라마의 구조상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영화에서 판타지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2000년대 초반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반지의 제왕> 시리즈 류의 하이 판타지 영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세계, 즉 이차 세계의 내적 믿음”[각주:2]을 중요시하며 영웅서사시, 기사 모험담, 고딕소설, 전설 등의 모험, 초자연적인 것, 신화적인 요소를 통해 나름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구축해서 보여준다. 또한 SF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슈퍼히어로물 등 비현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도 판타지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판타지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하이 판타지와 판타지 요소를 갖춘 영화를 종합해서 ‘판타지물’로 부를 수 있겠다. 2000년에서 2016년까지 전 세계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를 대상으로 한 박스오피스 10위권 영화들을 살펴보면,[각주:3] 007 시리즈를 비롯한 몇몇 액션 스릴러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영화가 <해리 포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시리즈, <아바타>, < 배트맨> 시리즈, <트랜스포머> 시리즈 등 비현실 기반의 판타지물이거나 애니메이션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판타지가 영화계를 점령한 것이다. 


세계 영화계 특히 할리우드에서 이런 비현실 기반의 판타지가 대세로 등극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역사적 경향으로서의 탈정치화다. ‘역사의 종언’ 선언 이후 등장한 탈정치화된 흐름에서 영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말처럼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대표적 문화상품”이 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 영화는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개념을 탄생시키며 탈정치화의 선봉에 섰다. 또 하나는, 문화적 경향의 포스트모던한 전환이다. 이미 발표된 코믹스 작품을 실사화해 선보이는 슈퍼히어로물, 그리고 컴퓨터 특수효과로 환상성을 극대화한 <반지의 제왕> 류의 판타지물은 ‘혼종성’ 및 ‘스펙터클에 대한 강조’라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한 경향을 보여준다.


한국 영화계에서도 최근 <부산행>처럼 판타지 요소를 도입한 재난영화가 천만 넘는 관객을 돌파하며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 14편 중 <부산행>과 <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역사물이거나 범죄액션, 재난, 휴먼드라마 등 현실 기반 영화들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상업 영화의 보편이자 모범으로 상정되는 한국 영화계에서 판타지물의 제작은 막대한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판타지물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영상문화계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작품에 판타지적 요소를 도입한 곳은 드라마 현장이었다.


지상파, 케이블 가릴것 없이 2010년 이후 드라마에 눈에 띄게 도입된 판타지는 최근까지 주로 장르 혼합적인 특성을 띠며 나타났다. ‘타임슬립’이나 ‘ 초자연적 능력’ 같은 판타지 요소를 도입해 의학, 수사, 법정, 로맨스 등의 장르와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판타지 로맨스물이라 할 수 있다. 2010년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시크릿 가든>은 싸가지 없는 재벌 남자 주인공과 씩씩한 평범녀가 얽히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에 남녀의 영혼이 뒤바뀌는 판타지를 담고 있다. <시크릿 가든>의 성공을 필두로 수많은 판타지 멜로물이 뒤를 이었다. 시간여행을 하게 된 조선시대 선비와 무명여배우의 사랑을 그린 <인현왕후의 남자>(2012), 21세기로 온 왕세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옥탑방 왕세자>(2012), 조선시대로 시간 이동을 한 의사가 펼치는 모험을 그린 <닥터진>(2012), 고려시대로 타임슬립한 여의사와 무사의 사랑 이야기인 <신의>(2012), 타인의 마음을 읽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청년과 변호사의 법정물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2013),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찾아와 장래와 사랑에 대해 조언해주는 <미래의 선택>(2013), 반인반수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구가의 서>(2013), 외계인과 여배우의 사랑 이야기인 <별에서 온 그대>(2013), 귀신 보는 능력을 가진 여자와 사장의 호러 연애물 <주군의 태양>(2013), 조선시대에 떨어진 고3 여학생과 조선의 왕 이도의 로맨스를 그린 웹드라마 <퐁당퐁당LOVE>(2015), 뱀파이어 선비와 남장 여자의 이야기인 <밤을 걷는 선비>(2015), 처녀귀신이 빙의한 소심한 여자와 셰프의 사랑을 다룬 <오 나의 귀신님>(2015), 평범한 여자가 우연히 천 년전 고려로 타임 슬립한 뒤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2016), 인어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푸른 바다의 전설>(2016), 천년을 넘게 살아 온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의 이야기인 <도깨비>(2016), 괴력을 가진 여자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정의를 실현하고 게임회사 CEO와의 사랑에도 성공하는 <힘쎈 여자 도봉순>(2017)까지 로맨스에 판타지라는 요소를 덧붙인 드라마의 리스트는 길게 이어진다.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2013)이나 <신의 선물, 14일>(2014), <시그널 >(2016), <터널>(2017)처럼 로맨스보다는 미스터리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판 타지 작품들도 있었지만, 2010년 이후 한국 드라마의 제작 양상을 돌아볼 때 판타지의 좋은 짝은 단연 로맨스 멜로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판타지’가 ‘관계 판타지’를 만났을 때


그렇다면 TV 드라마에서 판타지는 왜 이다지도 로맨스를 선호하는가? 먼저, 산업적 측면에서 보자면 예산문제를 들 수 있다. 미드 <왕좌의 게임>이나 영화 <반지의 제왕>처럼 본격 ‘하이 판타지’가 아니라 TV 드라마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적은 예산의 판타지로는 로맨스 판타지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목할 점은, 로맨스만큼 판타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서사가 없다는 것이다. 연애소설과 TV 드라마 속 로맨스가 여성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관계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은 익숙하다. 즉 로맨스가 일종의 ‘관계 판타지’라는 말인데, 이 판타지를 구성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가능하다” 등 ‘낭만적 사랑의 신화’ 다. 


또 한편으로 연애소설과 TV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로맨스 서사는 바로 ‘계급차 로맨스’다. 이른바, 재벌 남자 주인공과 평범한 여자 주인공이 계급 차이에서 비롯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예컨대, 시어머니의 물 끼얹기와 돈 봉투 들이밀기 등) 사랑의 완성, 그러니까 대개는 결혼이라는 골대로 입성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낭만적 사랑의 신화’와 ‘계급 로맨스’는 판타지를 만나 어떤 식으로 변모했을까?


초자연적 능력자가 등장하는 역대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중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단연 <별에서 온 그대>와 <도깨비>라 할 수 있다. 이들 드라마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초인적 캐릭터’ 즉 외계인과 도깨비가 등장한다. 2013년 12월에 방영을 시작한 <별에서 온 그대>의 남자 주인공 도민준(김수현 분)은 타고 온 UFO가 조선시대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지구에서 400여 년을 살아온 외계인이다. 그는 매의 시력과 늑대의 청력,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의 초인적 캐릭터다. 그런 그가 톱스타 천송이(전지현 분)를 만나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다. 


드라마 <도깨비>에도 역시 범상치 않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고려의 무신인 김신(공유 분)은 역적으로 몰려 죽어야 할 운명이었으나 하늘의 계획으로 인해 몸에 칼이 꽂힌 채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 900여 년을 살아온다. 그런 그가 자신의 불멸 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갈등이 서사의 주를 이룬다.


이들 외계인과 도깨비는 가히 완벽한 스펙을 보여준다. 훌륭한 외모는 옵션이고 몇백년동안 쌓은 어마어마한 부,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고급스런 취향, 비밀스러운 면모, 압도적인 물리력,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능력까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그야말로 꿈의 스펙을 지닌 이상의 남성이다. 한편, 이들의 상대역은 어떠한가? <별에서 온 그대>의 여자 주인공은 남 눈치 보지않고 성질대로 사는 대한민국의 톱스타다. 외계인도 놀랄 정도로 뇌가 순수하며 가끔 개념을 상실한 것처럼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도깨비>의 여자 주인공은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이모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는 가여운 소녀다. 거기다 귀신을 보는 능력을 타고난 덕분에 학교에서는 왕따까지 당한다. 그러나 신기할 정도의 낙천적 성격 때문에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처럼 완벽한 ‘비인간적’ 존재인 남자 주인공과 당돌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여자 주인공의 조합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비인간적일 만큼’ 완벽한 스펙을 갖춘 실장님 류의 재벌 남자와 씩씩하고 순수한 캔디 류의 서민 여자—캔디 류의 여주인공은 일견 평범해 보일 수 있으나 알고 보면 위의 판타지 속 여주인공들처럼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불가사의할 만큼 꿋꿋하거나, 재벌 남자 주인공이 보여주는 장밋빛 미래에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점에서 말이다—의 조합, 바로 그 계급차 로맨스의 전형적인 커플 구성이다. 


남자 주인공이 보유한 초인적 능력은 로맨스를 견인하는 매력의 자산인 동시에 사랑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일례로,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초인이기 때문에) 갖는 태생적 운명은 계급차 로맨스에서 연인의 사랑을 가로막는 집안의 반대 혹은 자본주의적 사회의 장애물 역할을 대신한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민준은 우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되고 <도깨비>의 김신은 그의 능력의 원천이자 저주인 가슴에 꽂힌 검이 뽑혀야만 그가 900년 동안 원하던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이들의 상황은 연인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동시에 이들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초인성’ 혹은 그에 따른 운명이라는 코드가 계급성을 대신할 뿐 초인이 등장하는 판타지 로맨스와 재벌이 등장하는 계급차 로맨스의 서사적 문법은 동일하다.


반대로 초인적 능력을 보유한 쪽이 여성인 경우가 있다. <별에서 온 그대> 의 작가의 후속작인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인어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어인 심청(전지현 분)은 텔레파시를 할 수 있고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회복력과 괴력 등 육체적 능력도 탁월하다. 심지어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말 그대로 ‘진주’가 된다. <푸른 바다의 전설>의 이야기 전개는 <별에서 온 그대>의 구조와 비슷하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하면서 전생의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의 사연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성 캐릭터로만 보자면 심청은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보다 퇴보했다. 물론 때로는 전형적인 계급차 로맨스 클리셰인 ‘남자 집안으로부터 물세례 받기’를 비꼬는 듯한 “저 물벼락 맞으면 안 돼요”(물을 맞으면 지느러미가 노출된다) 같은 대사로 재기발랄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어인 자신은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는 수동성, 자신이 흘린 눈물이 진주라는걸 알게되자 이것을 모아 남자에게 다 갖다 주겠다는 지고지순함은, 지난 몇 십년간 조금씩이나마 진보해 온 여성 캐릭터를 순식간에 <청춘의 덫>(1999)[각주:4] 시절로 회귀시켜 버린다. 상대로 등장하는 허준재(이민호 분)가 심청에게 매력을 느끼는 지점도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라기 보다는 그녀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돌발적으로 드러나는 심청의 능력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허준재는 결국 세상살이에 어둡고 어리숙한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슈퍼 히어로급의 괴력을 소유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힘쎈 여자 도봉순 >의 경우를 보자. 여주인공인 도봉순(박보영 분)은 단순히 힘이 좀 센 정도가 아니라 자동차를 가뿐히 던져버리고 질주하는 버스를 맨손으로 세울 만큼 어마어마한 괴력을 지닌 여자로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인 안민혁(박형식 분)이 맨 처음 도봉순과 얽히게 되는 시점은 이런 괴력을 발견하고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하면서부터지만 이 괴력이 그가 사랑에 빠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괴력과 상반되는 지켜주고 싶은 여자로서의 귀엽고 자그마한 외형, 그리고 애교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도봉순의 애교가 이어질 때마다 “너 어떡하지?”라는 대사와 함께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안민혁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게다가, 여주인공의 괴력은 관계에 갈등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도봉순이 자신의 힘을 선용하기로 마음먹고 납치범과의 일대일 대결에 나서려고 하자 안민혁은 “나는 너한테 뭐냐?”며 자신이 보호자로 나설 수 없는 입장을 괴로워한다. 


이렇듯 남성 주인공의 초인적 능력이 모티프가 되는 드라마에서 그가 소유한 초인적 능력이 재력이자 매력이며 여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과 달리, 여성의 초인적 능력은 여성적 매력에 양념처럼 곁들여진 수준에 머무르거나 오히려 애정관계에 있어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다. 정리하자면, 초인적 능력이 낭만적 사 랑의 자원이 되는 것은 아직도 ‘남성 한정’에 머무르고 있으며, 여성이 초인적 능력을 지닌 드라마에서조차 남녀 역할의 전복적 재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초인남이 기존의 ‘재벌 2세 실장님’ 을 대신해 계급차 로맨스의 전통적인 남자 주인공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면, 과거 그 수많은 금수저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난 사회 드라마에서 악인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멤버, 아들의 전쟁>(2015)의 남규만(남궁민 분), <피고인>(2017)의 차민호(엄기준 분), <귓속말>(2017)의 강정일(권율 분), <맨투맨 >(2017)의 모승재(연정훈 분)는 드라마 속 대표적인 금수저 악역들이다. 


금수저들이 로맨스에서 사회물로 장르를 옮겨간 것은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개인의 능력이 부모의 상속을 넘어설 수 없게 된 한국 사회에서 금수저들의 일탈과 패륜적 행위는 별 어려움없이 그들을 공공의 적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 하나, 그 어느때보다 결혼에 의한 계급간 교차가 어려워진 시대적 분위기가 있다. 서민 출신의 평범한 여자가 재벌 2세를 만나 남자 집안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하는 해피엔딩의 서사는 그 자체로 너무나 ‘판타지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연애와 결혼 등 결속을 공고히 하는 모든 행위는 아비튀스를 공유한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어머니가 굳이 돈봉투와 물세례를 준비할 일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초인남 판타지는 수저 계급론이 출현시킨 사회적 부산물이라 할만하다. 대체 풍부한 재력에 평생 늙지도 않는데다 사회적 계층 구분에서 자유롭기까지 한 ‘가족 없 는 초인남’ 만큼 매력적인 대상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3. 타임슬립 모티프가 불러내는 해원(解)의 념


2012년은 타임슬립[각주:5]5 로맨스 드라마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해였다. < 인현왕후의 남자> <옥탑방 왕세자> <닥터진> <신의>가 모두 같은 해에 전파를 탔으며 로맨스 드라마에서의 타임슬립 모티프의 흥행력을 확신한 드라마계는 그 후로도 <미래의 선택>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퐁당퐁당LOVE> <사임당, 빛의 일기> <내일 그대와> <시카고 타자기> 등을 쏟아냈다. 이중 비교적 최근 드라마인 <사임당, 빛의 일기> <내일 그대와> <시카고 타자기> 등이 시청률 부진을 보이기는 했지만, 타임슬립은 여전히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의 중요한 모티프로 소구되고 있다. 


타임슬립 모티프가 로맨스와 만났을 때 갖는 장점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대적 차이에서 비롯된 이질성에 있다. 이 이질성은 남녀의 애정관계에 있어서 호감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사랑하는 남녀가 시간적 차이에 의해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점, 언젠가는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발생되는 애절함의 극대화가 로맨스를 견인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시간대가 아닌 다른 시간대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타임슬립 모티프의 가장 강력한 진동은 무엇보다 지금의 현실을 반전시 키고자 하는 욕망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타임슬립 모티프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정작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었다.


2016년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드라마 <시그널>은 무전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교신하고 이를 통해 미제 사건을 풀어낸다는, 타임슬립 모티프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그널>의 타임슬립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 소통의 통로를 열고, 나아가 억울한 희생을 위로한다는 주술의 원래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차용한다.[각주:6] 성수대교 붕괴 사건, 대도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등 동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 속 미제 사건들은, 과거와 현재의 소통으로 이뤄진 무전 교신을 통해 그 가려진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돈 있고 빽 있으면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는다” “누군가 포기하기 때문에 미제 사건이 만들어진다”는 드라마 속 형사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무전을 촉발해 서로 다른 두 시간대를 연결하게 만드는 주된 동력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분노다. 또한 여기에 주인공 형사들의 개인사에 얽힌 강력한 감정적 요소가 투입된다. 수사기관의 포기 속에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년을 가려졌던 미제 사건의 실체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무전이라는 장치, 그리고 거기에 기댄 주인공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미제 사건이 풀려 나가는 와중에 드러나는 것은 오랜 세월 국가기관이 헤아려주지 못한 피해자 및 피해자 가족의 고통이다. 결국 이 피해자들의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해원(解)에 대한 염원이야말로 ‘과거로부터 온 무전’이라는 타임슬립 모티프를 작동시킨 원천적 이유라는 사실이 마지막에 드러난다. 이렇듯 타임슬립이라는 장치가 갖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해원의 도구로 쓰임으로써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각주:7]


비록 <시그널>이 직접적으로 세월호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진 않지만, 미제 사건을 다루는 이 드라마가 세월호의 영향 아래 있는 ‘포스트 4・16 드라마’[각주:8]라는 해석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국면이라 할 수 있는 세월호 참사는 대중문화 곳곳에 스며들었고 <시그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그널> 속 미제 사건은 국가기관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에 발생하며 이는 곧 남은 이들의 치유되지 않는 아픔으로 귀결된다. 


세월호는 촛불 혁명의 불씨로 인해 다행히 최근 배의 인양과 함께 미수습자 수색이 진행 중이지만, 지난 3년간 일종의 미제 사건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지워져 가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 당시, 그 어떤 구조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정부 당국과 이와는 상반되게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했던 민간 낚싯배들의 모습은 국가적 보호 부재 속에서 사적 자원에 의지해 살아남아야 하는 한국인의 현실을 충격적으로 각인시켰다. 당시의 충격은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트라우마 를 남겼고 결국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점화제 역할을 해냈다. <시그널>이 방영되던 당시, 드라마 속에서 미제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대리만족의 경험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 사회의 현실을 더욱 씁쓸하게 반추하도록 만들었다.



4. 나가며



모든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다. 허구적 서사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환상은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이야기가 종료되는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서사는 갈등 상황을 거쳐 적절한 엔딩으로 종료되지만, 삶은 종료 없이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에 서사적 종결이 주는 완벽한 마감은 결코 존재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판타지인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근대서사의 세계에서 정통의 자리는 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이 독점해왔다. 장르로서의 판타지는 리얼리즘 작품에 비해 줄곧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세계 영화계의 박스오피스를 휩쓴 대부분의 영화가 하이 판타지, SF, 애니메이션, 슈퍼히어로물 등 판타지물로 채워지고 있는 지금의 현상은 장르 위계의 역전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대로 20세기 말 문화의 영역에서 나타난 ‘탈정치성’과 ‘포스트모던한 전환’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성이 이성의 배면(背面)이듯 환상이 현실의 배면이라고 했을 때, 판타지는 어쩌면 일종의 시대정신인지도 모른다. 21세기의 문을 열어젖힌 9・11 테러를 시작으로 테러가 일상이 된 시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격화시킨 경제적 양극화의 시대. 미세먼지와 기후변화라는 일상화된 생태적 위기에 노출된 시대. 인공지능이라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실 앞에서 존재에 대한 모호한 위협을 느끼는 시대. 판타지는 이 시대의 묵시록적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판타지는 할리우드를 거쳐 이제 우리의 안방으로 쇄도하고 있다.


안방의 영원한 강자인 로맨스와 결합한 판타지는 ‘로맨스 판타지’라는 새로운 혼합 장르를 개척했지만, ‘초인’과 ‘재벌 2세’를 바꿔치기 했을 뿐 기존의 한국 로맨스 드라마 서사를 동어반복함으로써 불평등한 젠더관계를 고수하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낸다. 한편, 스릴러 드라마와 결합한 ‘타임슬립 판타지’는 가려졌던 진실을 밝혀내는 중요한 장치로 쓰임으로써 현실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서사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데 현실 반전이 비단 서사의 욕망뿐인 걸까? 그보다는 지금 한국 사회의 사회적 무의식, 즉 시대정신이 바로 그 ‘ 현실 반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촛불 현장과 대선 과정에서 가장 크게 들려온 구호가 ‘적폐 청산’이었음을 떠올려보라). 이렇듯 최근 한국 드라마 속의 판타지는 TV 드라마 장르 확장의 주역이자, 현실을 재강화하면서 동시에 현실 반전의 욕망을 드러내는 등 모순적으로 작동함으로써 현실의 배면으로서의 스스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 「TV 판타지 드라마의 장르혼합 양상 연구: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주군의 태양>을 중심으로」, 이여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4. [본문으로]
  2. J.R.R. Tolkien, On Fairy-Stor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7), 68. [본문으로]
  3. http://www.boxofficemojo.com 참조. [본문으로]
  4. <청춘의 덫>은 SBS에서 1999년 1월 27일부터 4월 15일까지 방영한 드라마로 1978년에 MBC에서 방 한 동명의 주말 연속극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한 남성이 신분 상승을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애인을 버리자 그 애인이 복수한다는 이야기로, 시청률 53.1퍼센트를 기록했다. 역대 한국 드라마를 통틀어 17위의 시청률을 기록한 김수현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5. 타임슬립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 혹은 미래에 떨어지는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의도를 갖고 행해진 시간 여행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되지만 이 글에서는 시간여행의 모티프를 지닌 작품들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타임슬립물’이라 부르기로 한다. [본문으로]
  6. <시그널> 서사의 주술적 장치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이지행, 「연쇄하는 재난의 세계를 건너기: 묵시록적 포스트모던 재현의 양상」, 『대중서사연구』 23권 1호, 2017 참조. [본문으로]
  7. <시그널>뿐 아니라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나 <신의 선물, 14일>의 주인공들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막기 위해 반복적으로 과거에 뛰어든다. <터널>의 주인공 형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30년 후의 미래에 떨어지게 되는데, 결국 그는 과거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연쇄살인의 범인과 미래에서 맞닥 뜨리게 된다. [본문으로]
  8. 유선희, 구둘래, 「드라마・영화 곳곳에 새긴 세월호」, 『한겨레』, 2017. 4. 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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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인간에 대한 연민이 지켜낸 품위  (0) 2016.03.12
Posted by 미와카주

8, 90년대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었다가 IMF로 버블이 꺼지면서 직격탄을 맞은 부모는 잠실의 아파트에서 밀려나 옆 동네 월세 빌라에 살면서도 부동산 버블 시대에 대한 향수와 인생 역전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부모를 지켜보는 감독의 카메라는 그들의 부동산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뒤쫓는다. 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과 부동산 열기는 그대로 베이비 붐 세대의 욕망이 되었고, 베이비 붐 세대인 감독의 부모 역시 화학 공장에서 일하다 집 장사에 눈을 떠 시대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건설과 개발, ‘하면 된다’로 요약되는 시대는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시대에 자리를 내줬고, 그렇게 바뀐 시대의 수레바퀴 아래서 감독의 부모를 비롯한 수많은 개미 민중들이 깔려 죽었다. 이 영화는 게임에서 언제나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바로 그 ‘개미’들에 대한 이야기다. 

<버블 패밀리>[각주:1]의 감독은 부동산 호황기에 ‘집 장사’를 통해 중산층으로 올라선 부모 아래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외동딸이다. 그 딸이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씁쓸한 경제적 몰락 위에 서 있는 부모님의 오늘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적 다큐멘터리의 여러 갈래 안에서도 가족 다큐는 한국적 가족 관계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상당히 껄끄러운 작업이다. 또한 가족의 내밀한 사연을 익명의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기에 복잡한 각오를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 다큐라는 미션을 수행하는 이들은 부모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촬영 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끝나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미움이든 포용이든 말이다. 그래야만 갈등의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객관적인 마음의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조금 이상하다. 부모의 가장 추레하고 비참한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모를 의식하고 마음 쓰는 감독이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살림살이에도 끝까지 부동산 한 방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를, 때론 어이없는 헛웃음으로 대하다가도 곧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기도 한다. 평가하고 해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가 결국은 그 과정에서 부모의 삶의 궤적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영화의 마지막, 엄마가 빚까지 져가며 딸의 이름으로 사둔 임야를 바라보며 감독은 중얼거린다. “이 땅 때문에 빚을 져야했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만 같다.” 감독 자신 역시 부모로부터 환경과 습성과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을 그래서 스스로도 자기 영화의 대상인 부모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씁쓸하게 인정하는 창작자의 태도에 뭔가 신뢰가 갔다면 이상한 얘기인 걸까. 

이 영화는 감독의 가족사를 통해 근현대 한국이라는 공간에 개입해 들어온 자본주의의 문제 즉 지정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한국의 중산층이 87년 절차적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90년대 소비 자유주의시대, 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어떻게 비상하다 추락했는지를, 우리는 부동산의 몰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게임에서 정보와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개미들은 언제라도 치명타를 맞고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영화는 증언한다. 부동산 몰락이 베이비 붐 세대 생애사의 한 챕터였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생애사에는 또 다른 형태의 몰락이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은 2017.06.15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다큐멘터리 초이스에 실려있습니다.

  1. 감독 마민지, 2017 [본문으로]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