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우울증 병가를 마친 주인공의 복직 문제를 두고
사장은 다른 근로자들로 하여금
보너스와 주인공의 복직 중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구도를 짠다.

 

이런 구도 속에서
복직을 하려고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보너스를 포기해줄 것을 요청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파렴치하다는 비난을 받으며
때론 폭력사태로 번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매출의 최대화와 효율적 경영전략이라는 모토 아래
그 어느때보다 잔인한 고용축소의 칼날로 파이를 늘려놓고도
그 파이를 임금노동자와 나누지않고 자신에게만 귀속시키는 자본가,
시장의 논리라며 이를 방치하는 정부,
그리고 자신을 피해간 칼날에 안도하며 그로 인한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비난은
지금 애꿎은 여성과 이주노동자를 겨누고 있다.

 

일자리 축소와 그로 인한 생계의 두려움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때문이 아니다.

 

독일의 신나치 발흥이나
프랑스의 샤를리 엡도건으로 바라본 아랍이민들의 게토화된 실상
그리고 IS로 떠나간 한국 소년의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상태는
모두다 탓해야할 대상을 놔두고 엉뚱한 대상에 분노를 집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동료의 복직이냐 보너스냐를
선택해야만 하게 판을 짠건 사장인데
왜 동료끼리 서로를 미워해야만 하는가.

 

중요한 건 사장의 마지막 제안에 나오듯
결국 보너스도 복직도 모두 허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을 해고하지 않으면
공장이 망하거나 아님 다른이를 해고해야만 하거나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근로자를 고용한다는 건
넓은 의미에서 잠재적 소비자를 길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파이를 나누지 않으려는 자본가의 욕심을
합리적인 경영상의 결정으로만 포장하는 사회에 화를 내야한다.

이제 곧 여성도, 외국인 노동자도 아닌
기계와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잠식하는 시대가 오면
그땐 기계를 혐오하며 테러하고 때려부술건가?

 

주인공의 복직을 위한 투표는 결국 복직 실패로 결론나고

착잡한 마음으로 짐을 싸는 그녀에게

사장은 한가지 제안을 한다.

 

"당신을 다시 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신 계약직 노동자 한명을 내보내야한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계약직 노동자의 바로 그 얼굴을 떠올리며

말없이 자리에서 떠나는 주인공.

 

비록 투표를 호소하는 주말 동안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와 관객은 똑똑히 깨닫게 된다.

 

자본의 강고한 틀거리 안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연대solidarity며

연대란 결국 역지사지의 측은지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실패라는 것은

바로 이럴 때 쓰이는 말일 것이다.

  

 


Posted by 미와카주

 

사진은 사진 속 피사체가 한때 그곳에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알려줌으로써

대상의 유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매체이다.

 

유한성을 드러내는 매체로서의 강렬함은 사진에 비해 약하지만,

영화의 스크린 역시 지금 관객이 보고 있는 ‘이곳’이 아닌 예전의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른 말로 하자면 ‘촬영된’) 일들이 뒤늦게 당도한,

이른바 ‘유예된 현재 진행형‘의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야말로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다시 되살려내서 보는 행위’,

즉 ‘추억’과 ‘애도’의 본질에 가장 깊숙이 닿아있는 예술형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 ‘상실’과 ‘애도’의 플롯은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공포’ 장르까지를 아우르며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감정적 전이를 불러일으킨다.

 

‘상실’과 ‘애도’의 념(念)이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과 유사한 지점이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학문적 설명은 그러하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내가 유독 ‘상실’과 ‘애도’를 다루는 영화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지점이 있다.

 

말하자면 나란 사람은,

다신 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서 보는걸

좋아한다고 밖엔 말할 도리가 없다.

 

<래빗 홀>의 애도의 플롯은 익숙한 전개를 따른다.

 

8개월 전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젊은 부부가 있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는 살아지지 않는 나날들을 살아낸다.

 

분노와 그로 인해 외부와의 차단을 선택한 아내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들을 잃고 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주지 않았음을 원망하며, 철없는 여동생이 남의 남자친구를 뺏어 임신을 한 사실에 축하보다 경악이 먼저 앞서고, 나이 서른에 마약 과용으로 죽은 남동생과 자신의 아들을 자꾸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내세우는 친정엄마에게 진저리가 난다.

 

남편은 묵묵히 회사에 나가고 아내의 기색을 살피며, 가족을 잃은 이들의 치유모임에 아내를 데려가고, 밤마다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아들이 찍힌 휴대폰 동영상을 소리죽여 본다.

 

이들은 각자 상대의 애도의 방식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떨땐 모른척 하고 때론 격렬하게 부딪힌다.

 

아내는 어느날 차를 몰고가다 스쿨버스에 앉아있는 고등학생 남자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으며 아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까지 따라 대출하는 아내. 책의 제목은 ‘평행 우주’이다.

아이 역시 아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날 쫓아가던 아이를 놓쳐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앞에 선다.

아이는 바로, 개를 쫓아 도로로 튀어나온 여자의 아들을 차로 친 가해자였다.

 

둘은 공원 벤치에서 가끔 만남을 갖는다.

아내가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아이의 대학 입학문제, 이 세상에는 여러 버전의 내가 살고 있다는 ‘평행 우주’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여자가 묘한 눈으로 묻는다.

 

"이 세상 어딘가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한.. 또다른 내가 살고있다구?

그거... 좋구나."

 

‘평행 우주’ 이론을 모티브로 아이가 그리는 ‘래빗홀‘이라는 카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아이가 말한다.

 

“그때.. 어쩌면 제가 시속 30km보다 좀 더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싶으면 늘 계기판을 보면서 브레이크를 밟곤 했는데, 그때 31, 아니 32였을지도.. 아님 어쩌면 더 빨리 달렸을지도 몰라요.

저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괜찮아. 알아. 알아”

 

아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의 속도가 정확히 어땠고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는지 여부도 결코 알수 없었겠지만 아이의 죄책감만은 뼈저리게 느낀 여자는 아이를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우리 아이는 천국에 가서 천사가 됐을 거에요’ 하는 어느 부모의 고백에 코웃음을 치며 ‘천사가 필요하면 따로 하나 만들면 되지 왜 굳이 남의 아이를 데려간거냐’, ‘신은 새디스트’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녀가,

정작 아들을 죽게 만든 가해자의 고통을 통해 줄곧 외면해오던 애도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인간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깨닫고 성숙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상처를 덮는데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영화들이 2시간 만에 속성으로 깨우침과 화해를 전달하기 위해

성마른 엔딩을 남발하는 지금, 상처입은 사람의 멈춰버린 시간을 인내심있게 보여주는 <래빗홀>의 서사방식은 영화가 가진 소중한 결 중에 하나다.

 

Posted by 미와카주


엄마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린 올리버가 어떤 질문을 해도 유머를 섞어 시시하지 않게 대답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유쾌함이 도를 넘어 시니컬해지기 전까지는 딱 좋았다. 

 

올리버의 엄마가 미술관 관장인 올리버의 아빠가 기획한 아트 오프닝에서

예술 애호가연 하는 늙은 여자의 얼굴에 뺨을 들이밀며 자기 파괴적 광대짓을 할때

영화를 보던 나는 올리버가 되어 ‘엄마, 제발 좀~’이라고 절규하고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오래도록 목줄 매인 사람이란

원체 그렇게 당황스런 시간과 장소에서 맥락없이 폭발하기 마련인것을.

오래도록 냉담하고 예의발랐던 결혼생활 끝에 엄마가 죽고 자신과 단둘만 남은 아버지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할지도 아직 결정 못했는데 홀로 남겨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엄숙하게 커밍아웃을 한다.

 

올리버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게이 파트너를 사귄 후

지적이고 품위 있던 아버지는 올리버 보기에 온갖 부끄러운 짓을 다하고 다닌다.

 

히피같은 어린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모자라

아이처럼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클럽에 가서 하우스 뮤직에 몸을 부리고

게이 인권 모임에 나가 갑자기 게이 프라이드의 선발주자 노릇을 하려든다.

 

한때 품위 있던 아버지 주변은

이제 품위와 등진 온갖 종류의 게이들 천지다.

아버지가 시한부 선언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투약 시간을 확인하며 충실하게 곁을 지키는 올리버 대신

아버지의 눈동자는 가끔 꽃을 들고 바람처럼 찾아오는 남자 파트너에게 꽂혀있다.

 

올리버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병실을 밤새 지키며

엄습하는 불안감에도 애써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 얼굴에 혈색이 돌게 하는 파트너에게도

몸에 익은 예의로 관대하게 굴기로 마음먹는다.

 

어렵진 않다.

평생 아버지의 등을 보고 산 엄마에게 배운 익숙한 체념이다.

하지만 그는, 밑빠진 독처럼 슬프다.


‘사실 우린 모두 선의를 지닌 좋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미처 돌아보지 못한 진짜 나 자신, 보답받지 못한 채 몇십년을 바라만보는 사랑하는 이의 등, 늘 함께 하는 엄마의 공허를 보면서도 내가 그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할수 없을만큼 소심한게 또 우리죠. 그 소심함이 우리 모두를 외롭게 했어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죽고 나자, 다시 할 일이 먼지처럼 쌓인다.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짐을 정리하고 버리고 아버지의 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개에게 침실과 주방 욕실의 용도를 마치 사람에게 하듯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쓸쓸했던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홀로 남아 쓸쓸히 하면서 침대에 누워있어도 쓸쓸한 바람이 연신 등으로 파고드는 어느날 밤.

친구들의 강요로 참석한 파티에서 그는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이런 파티에 왔어요?’ 묻는 프랑스 여자에게 빠져든다. 


선의와 공허로 가득찬 집안에서 오랜 시간 외롭게 자란 올리버의 옆에

자유로운 공기를 뿌려대는 프랑스 여배우 ‘애나’가 등장하면서

잠시 올리버의 외로움이 채워지는가 싶었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정착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올리버는 그나마 아버지가 말년에 보여준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기억하며 따라해 보려 애를 쓴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질수록 애나 역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쓸쓸한 가족사를 짊어지고 있는 여자라는게 드러난다.

이 도시 저 도시의 호텔방에서 지내며 파격과 자유를 구사하던 애나와의 사랑은

애나가 처음으로 집에 올리버를 초대한 순간 판타지를 상실한 채 축 처지기 시작한다.

자신과 다를바 없는 외로운 이의 방을 본 순간, 올리버는 이 관계를 유지할 자신감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한 공간에서 서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

늘 해왔던 대로 올리버는 다시 혼자만의 방으로 숨는다.

 
태어나서 집안을 감싸던 쓸쓸한 기색부터 먼저 배운 남자.

누군가와 인생을 나누는 일에 도무지 자신이 없는 남자.

가족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함께 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행복해질거라 믿는 법을

올리버는 비기너가 되어 다시 배워갈 수 있을까.


<비기너스>는 내가 본 가장 슬프고 독특한 가족영화였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