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고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미국에서 아트스쿨을 다니던 1998년으로 기억한다. 벌써 18년전의 일이다. 


최근 나온 주목할만한 영화를 보여주고 아티스트와 대화를 하는 "필름 투데이"라는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에 고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이 자신의 영화 <애프터 라이프>(한국제목: 원더풀 라이프)를 들고 와서 학생들과 Q&A를 가졌다.


미련이 많아 사후세계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지대인 림보에 갇혀버린 영혼들의 이야기인 <애프터 라이프>는 예상과 달리 빤한 판타지를 착취하는 나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판타지임에도 기묘한 리얼리티가 끝까지 살아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영화를 보고 멍~하게 충격받은 몸뚱이로 Q&A를 마친 고레에다 감독에게 비칠비칠 다가가 소감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영어가 안되시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일찍이 일어를 열심히 하지 않았나 그날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Q&A에서의 모습도 영화감독보다는 학자 내지 소설가의 풍모가 느껴졌고, 눈이 참 맑았다는 기억이 있다. 아무튼, 영화도 사람도 호감이었던 그날의 인상 이후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좇아가는 동안 그는 깐느에서 상도 받고 어느덧 대가가 되어갔다. 가끔 한번씩 '으응?' 할 만한 작품을 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고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 우아하고 단아한 미쟝센, 배우를 알아보는 눈 등 너무 많은 좋은 점을 갖춘 그는 언제나 내게 있어 소중한 베스트 중 하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뭐랄까, (<걸어도 걸어도>부터 시작된) 오즈 야스지로 풍 고레에다류 영화의 연장 선상에 있는 영화같다. 그의 초기작인 <환상의 빛>, <디스턴스>,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가 상실과 애도로 몸부림치는 현장에 대한 사뭇 냉정할 정도로 담담한 응시였다면,  <걸어도 걸어도>가 나온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고레에다 제 2기 작품들은 인생에 대한 폭넓은 긍정과 따뜻한 응시가 자연스레 오즈의 가족극을 떠올리게 한다.   


아야세 하루카(<호타루의 빛>의 그 유명한 '건어물녀'),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카세 료, 츠츠미 신이치 등 그야말로 일본 영화 및 방송계의 달링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그냥저냥 괜찮은 배우가 좋은 감독을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일으키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사례 같은 작품이다. 아야세 하루카의 멍하고도 단정한 얼굴에서 그 멍함을 외려 책임감 많은 장녀의 신중함으로 읽게 만들고, 광고용 같은 그녀의 미소를 의기소침해 있을 의붓동생을 배려하는 애틋한 노력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 보통의 감독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주에게는 '익히 소비된 스타의 얼굴'에서 '평범한 사람의 빛'을 찾아주는 신묘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막내동생으로 나오는 히로세 스즈(스즈 역)는 <아무도 모른다>에서 야기라 유야가 보여준 '아름다운 어린 얼굴'의 여자아이 버전이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아아악 너무 예뻐" 소리가 절로 터져나온다. 보통은 영화에서 어린 여자애를 이 정도의 애정으로 찍어놓은 화면을 보다보면, 어쩔수 없이 카메라에 눌러붙은 (감독의 혹은 카메라의) 관음증적 시선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관음증적이고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꽃같은 소녀를 보면서 그녀와 동일시가 되기보단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관찰자의 마음이 되어 냉정하게 훑어보게 된다면, 즉 피사체의 객체화/대상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런 관객이라서가 아니라 이미 감독이 그런 시선으로 그 피사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유난히도 스즈를 자주 응시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관객으로서 눈물이 터지는 순간은 주로 스즈가 화면 가득 잡혀있는 순간들이다. "아버지를 돌봐줘서 고마워"라는 큰언니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 동급생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벚꽃터널을 아련하게 응시하는 모습, 마당에서 언니들과 불꽃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카메라가 스즈를 잡을때마다 관객은 피사체와의 거리를 잃고 그녀의 마음에 동일시된다. 어린 소녀를 즐겨 클로즈업하는 다른 감독들이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토록 어떤 관음증의 혐의도 없이 어린 소녀를 바라보는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주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의도가 묻어있었다면, 스즈가 목욕 타월을 그토록 우스꽝스럽고 과감하게 열어젖히는 뒷모습 장면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이야기에 남자를 중요한 갈등의 동인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렸을텐데도, 카세 료, 츠츠미 신이치 같은 일급배우들을 과감히 듣보잡 조연 취급 하며 여자들 주도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의 '정치적 올바름'에도 칭찬을 하고싶다. 큰 갈등의 판을 깔아준 건 아버지가 남기고 간 배다른 자매지만, 이후 그녀들의 세계에 남자가 일으킨 파란은 호수에 번진 물결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 그녀들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고레에다는 휴머니스트에 이어 페미니스트까지 넘보고 있는걸까. 


초기작들이 상실의 빈 자리를 애도하는 처연한 분위기가 다분했다면, <걸어도 걸어도> 이후의 고레에다는 삶의 비의에 대해 조금은 더 포용하고 감싸 안는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얼마나 별개의 존재인지는 익히 보고 들어 알고있지만, 왠지 고레에다의 지금까지를 지켜본 팬의 입장에서는, 그의 영화세계는 보기 드물게 인생에 대한 그의 자세와 정확히 공명하는 것 같다. 


왠지 그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 줄것만 같다.  

벌써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주의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Posted by 미와카주

한국영화의 전통에서 슈퍼히어로물을 찾아보라면 최동훈의 <전우치> 정도가 있을까. (우연찮게도 이 영화의 주연 역시 강동원이다) 


얼핏, 한국영화와 히어로물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그외 수많은 맨들이 존재하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경단주의에서 그 존립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국가권력에 반하지 않으면서 무능한 경찰력과 군사력을 보완해주는 존재로서의 자경단. 


이에 비해 역사의 갈피마다 강력한 중앙집중식 권력과 이에 대항하는 반정권 세력의 대립이 빈번했던 한국에서는 '자경단'이라는 당대 권력의 보완적 세력이 열광적 지지를 얻을 이유가 별로 없어보인다. 


<검은 사제들>은 할리우드산 슈퍼히어로물을 보고 자란 세대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적 재현의 전통(또는 강박) 위에 만들어놓은 아주 묘한 한국식 미스테리 스릴러 엑소시스트 히어로물이다. (마치 떡과 케잌의 조합같달까.) 


슈퍼히어로물 혹은 서양식 첩보스릴러 영화의 장르적 특징은 곳곳에 묻어난다. 


현대 이탈리아의 중세적 예배당. 

악령의 출현을 근심하는 작은 대화들로 이루어진 불길한 오프닝 시퀀스.  

비밀임무의 실패는 더 큰 재난을 불러오고.

이제 임무는 영화의 주인공에게 떠넘겨진다. 

이것은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 같은 미스테리 스릴러물에서 흔히 보아 왔던 전개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영화속에 본격적으로 서울의 풍경이 담기면서부터다.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마치 서울 속의 작은 서울처럼 자리한 명동. 

버텨온 세월만큼 온갖 역사적, 사회적 희비를 다 간직한 명동성당. 

그리고 지금은 무개성의 관광명소가 되버렸지만

한때 예술과 멋의 중심지였던 명동의 좁은 뒷골목.

그 속에 벌집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건물들. 

그 건물의 낭떠러지 같은 오래된 계단들.

그 안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구마의식. 


단지 그 골목에서 몇발자국만 나오면 되는 얼마 안되는 물리적 거리로 나뉘는 

빛과 그림자, 현실과 신화, 쾌락과 공포의 심리적 갈림길. 


한국적 미스터리 엑소시즘 영화의 공간적 사용이 어때야 하는가를 

무척 영리하게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해 일단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서양적인 구마의식과 토착적 공간의 이질적 어울림에 솔깃해 할 무렵

개인사의 어둠에 사로잡힌 최부제가 구마 공간을 뛰쳐나가고 나서부터

영화를 보던 나는 급격히 맥이 탁 하고 풀리는 경험을 한다. 


아... 저놈의 한국적 신파.

 

한쪽 신발을 잃고 찾아온 과거의 나와 맨발로 선 현재의 최부제가 대면해 화해하는 장면의 그 쓰잘데없이 길고 긴 감정 낭비 씬들. 영화의 처음, 한국 카톨릭 교단과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촌스럽지 않게 뉘앙스로 극을 이끌고 관객을 성인 대접해줬던 공을 영화는 이 한씬으로 모조리 날려버리고야 만다. 

(각성하자 한.국.신.파.) 


그렇게 길게, 오래, 성의껏, 타임라인을 쭉쭉 늘여가며 보여주지 않아도 우린 알아요. 

얘가 두렵다는거. 이겨내고 싶어한다는거. 돌아갈 빌미를 찾는다는 것까지도.  


그리고 다시 이어진 마지막 대악령을 쫓기위한 구마의식. 

귀신들린 소녀는 어마어마한 연기 끝에 끝내 절명하고 여기서 영화는 포기가 안된 신파의 똥물을 다시 한번 투척한다.


박소담이 미친 열연으로 잡아놓은 악령의 분위기에 김윤석의 오열하는 연기가 찬물을 촤악~ 하고 끼얹는다. 푸시식~ 화면에서 김이 빠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그렇게 티나게 울지않아도 안다니까요. 

그리고 원래 그런 캐릭터도 아니잖아요. 

성숙하게 갈무리된 어른의 감정을 보여주길 바라는건 그래서 주제와 걸맞는 불가해성을 느끼길 바라는 건 오직 나만의 헛된 꿈인가요. 


영화의 마지막. 

악령의 숙주가 될 처지에 이르른 최부제는 스스로 강물로 뛰어내려 악을 처단한다. 


그리고, 소녀도 깨어나고 최부제도 강에서 살아돌아온다. 


입가엔 씨익 웃음을 얹고 8등신 뒷모습을 어둠속으로 재촉한 채 

관객에게 프리퀄적인 클리셰를 선사하며 사라진다.


To Be Continued....의 예감을. 

"최부제, 악령 쫓는 젊은 사제의 탄생" 같은 제목을 화면위에 숨긴 채로.    

     

Posted by 미와카주

영화는 시작부터 유난히 색감이 어두워서
유독 자주 눈을 찡그리며 화면을 쳐다봐야 했다.

'이런... 극장 영사기 램프가 맛이 갔나?' 하던 순간
'아 이거 지금 디지털 영사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디지털 영사면 영사기 램프하곤 아마도 상관 없지않을까)

 

생각해보면 '세븐' '패닉룸' '소셜 네트워크' '밀레니엄' 같은 데이빗 핀처 영화들은
어슴프레한 공간에서 인물이 걷고 말하고 찡그리던 장면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를 찾아줘>에서 아내가 사라져버린걸 알고는
해질 무렵의 어슴프레한 광원 속에서 멍하니 서있는
벤 에플렉의 얼굴은
마치 지금부터 데이빗 핀처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여자' 스티븐 킹이라 불리는 길리언 플린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나를 찾아줘>는
왠만한 남자 사이코패스의 두 뺨을 번갈아 치고도 한바퀴 여유롭게 남는
인상적인 여자 사이코패스를 그린다.

 

엄청난 준비성과 끈기, 그리고 순발력의 삼위일체로 무장한 영화 속 여주인공은

잘 나가다 막판에 자만에 빠져
꼭 다 된 밥에 재 뿌리고 잡혀서 망신살 뻗치는 기존의 사이코패스들에게

이 시대 진정한 사이코패시 범죄의 강령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자만하지 말라"
"준비, 실행, 수정, 그리고 다시 또 실행하라"
"어떤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말고 우겨라"

 

만약 이 영화가 그저 한낱 걸출한 사이코패스에 대한 얘기일 뿐이라면

뭐, '세븐'은 그냥 사이코 잡는 형사 이야기고
'소셜네트워크'는 그저 페이스북 창시자의 성공담에 불과했겠지.

 

그러니까 데이빗 핀처는
이 영화에서 뭔가 좀 다른 얘기가 하고싶었을거고

자연스레 내 눈길은 (감독의 의도대로)
이런 규모의 대국민 우롱 범죄를 깔끔하게 수행해내는
가냘픈 여자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에 머물렀다.

 

여자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날, 남편이 어린 여제자에게 해주던 키스는

결혼 전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우연히 설탕공장을 지나다 맞은 설탕비 속에서 했던 키스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고

이 장면은 여자의 심장에 그대로 각인되어

그녀가 꿈꾸어왔던 이상적인 결혼생활, 둘만의 관계속에서만 만들어진다 믿었던 어떤 특별함나아가 스스로의 자존감까지 그대로 쓰레기통에 쳐넣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걸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남편을 응징하기 위해

남편이 대국민 심판대에 서서
거세게 몰아붙여지다 못해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실종'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한다.

이야기가 여기서 멈춘다면야

'아,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구나'
'아내를 화나게 하지말자'는
금과옥조의 교훈과 함께 훈훈하고 섬뜩하게 마무리되었겠으나

또 한번의 범죄와 함께 이어지는 후반부의 대반전은
여자의 복수심이 단순히 남자의 변심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원하던' 남자의 모습과
여자가 '원하던' 결혼의 이상적인 모습을 지탱하지 못했던 남자의 찌질함에 대한

응징이었음을 알려준다.

 

'나는 너를 위해
니가 원하는 '쿨하고 너그러운' 여자를 필사적으로 연기하면서
이 결혼에 매달렸는데

감히 넌 게으르고 무책임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세상의 무수한 찌질한 유부남들이 답습해서 이젠 신선하지도 않은
'젊은 년이랑 붙어먹기'나 시전하고 있다 이거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를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결혼에 대한 지당도사 같은 명제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당신은 그나마 내가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던 그때가
그래도 제일 봐줄만 했어"
(그러니까 평생 겁에 질린채로 내 눈치보면서 내 옆에서 늙어 죽어)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주인공.

 

아, 나는 관계에 대해서
이만큼이나 이기적인 (그리고 속시원한) 일갈은 듣도보도 못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여주고
상대의 존재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임감있고 화목하게 이어지는 결혼생활이란
과연 현실에 존재할수 있는 꿈일까.
존재할 수 없는 꿈이라서
그렇게나 다들 결혼하면 성숙해진다고들 말하는걸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

 

여주인공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된 연유에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상대에 맞춰 자유자재로 '자아'를 연기하는데 명수였고

그런 자아로 이룩한 관계가 지루해지거나 불량품이 될 때 

관계를 끝내기 위한 방편으로 '자해' '희생자 코스프레'를 해왔던 전력이 있다. 

이번에는 그것이 '실종'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기대에 맞춰 쿨한 여자의 자아를 입고 살아왔던 그녀는

남편의 불륜으로 더이상 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하에

과거의 자아를 포함해 모든 걸 버리면서

동시에 남편도 응징할 방법으로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다.

 

그러다 강도를 당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는 TV쇼에 나온 남편의 인터뷰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깨닫는다.

 

바로 남편이야말로

"한때 문제가 있었으나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서로를 지탱하게 된 부부"의 연기를 훌륭히 수행해 줄 후보자라는 것을. 

 

이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옛 남자친구를 스토커로 몰기 위한 마지막 완벽 범죄를 저지른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는 부부.

 

그녀에게 남편이 묻는다.

"왜 서로를 증오하면서 이런 쇼를 계속해야 하는 거지?"

"그게 바로 결혼이야"

 

'진짜인 나'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사는 그녀의 연기는 계속된다.

 


Posted by 미와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