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마고리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만행에 대한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처음 수면 위로 올라온 지 25년이 흘렀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1992년에 시작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는 1,200회를 넘겼고, 60대였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으며, 생존해계신 소수의 할머니들은 어느덧 90대가 되셨다. 그리고 지난 2015년 12월 28일,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10억 엔의 출연기금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불가역적인 한일 위안부합의를 맺은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상징인 소녀상은 외교적 논란의 대상으로 비화되어버렸다.  

캐나다 출신 티파니 슝 감독의 <나비의 눈물>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한국, 중국, 필리핀 출신 세 할머니의 일상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는 수요시위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스위스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위안부 문제를 증언하는 활동가의 삶을 바쁘게 살아낸다. 중국의 카오 할머니는 이 추위에 무슨 장작을 패냐는 딸의 타박에도, 아흔이 넘은 노구를 부지런히 움직여 땔감용 장작을 패놓는다.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자식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지만, 같은 마을의 위안부 피해자 모임에 나가는 용기를 낸다. 노래를 부르고 TV를 보고 장작을 패고 끼니를 챙기고 춤을 추고. 할머니들의 삶은 얼핏 보면 평범한 삶의 감각으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문득 그들이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쉴 때 그리고 무언가를 더듬는 듯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볼 때, 주변의 소리와 흐름을 멈추고 정지하는 카메라는 그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채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새어 나오는 긴 한숨 소리와 흔들리는 동공, 그리고 떨리듯 내뱉는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어 (It’s still there)”라는 목소리는, 전쟁 중 성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어떻게 이들로부터 평범한 삶의 감각을 앗아갔는지 드라마틱한 장치의 도움 없이도 그 자체로 천둥처럼 증언한다.  

영화는 유난히도 특정한 신체적 접촉에 주의를 기울인다. 함께 발맞추어 걸어가는 발, 꼬옥 잡고 쓸어주는 손, 옆으로 포개져 누운 채로 함께 이야기하며 안아주는 자식과 활동가의 몸은, 할머니들의 전 인생을 지배해 온 한숨과 정적의 순간을 마치 위로하듯 이불처럼 덮어준다. 여성의 몸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감내한 육체를 쓸어주고 껴안아주는 손은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타인에게 이처럼 소탈한 방식으로 온기와 존중을 전달해 줄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마땅한 대접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의 몸은 비단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성적인 약탈과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일까. 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전시에 일어나는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상대 남성 공동체를 파괴하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전략의 일환으로 실행된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그 여성 자체가 아닌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 대한 모멸과 위협으로 의미화되기 때문에, 전쟁 시 집단 강간은 상대 집단의 재생산과 문화 및 정체성을 파괴하는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20만 명의 아시아 여성을 유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일본군의 도덕적 타락에서 기인한 특수한 악행이 아니며, 남성중심적인 전쟁과 정복의 인류사에서 배태된 결과라는 측면에서 들여다봐야 한다. 

카오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일본군으로 인해 두 명의 아이를 낳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 아이들을 죽였다. 카오 할머니의 딸은 버려진 자신을 입양해 이날 이때까지 키워준 엄마의 놀라운 고백 앞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딸에게도 해줄 것이냐는 감독의 물음에 “해야죠. 아이가 좀 더 크면 꼭 얘기해줄 거에요” 하고 다짐한다. 아델라 할머니는 죽은 남편의 묘에서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아들에게도 뒤늦게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건 내 인생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아들의 몫”이라며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 할머니는 아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돌아온 뒤 “무거웠던 영혼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라 할머니는 영면에 든다. 13세에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일본에 갔다가 위안부가 된 길원옥 할머니는 5년간의 위안부 생활이 끝나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당도한 곳이 고향인 평양이 아닌 인천임을 알게 된다. 곧이어 북한으로 가는 국경이 막히고, 낯선 남한 땅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할머니는 자신이 몸을 의탁하던 곳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받아 자신의 아들로 키워낸다. 비록 끔찍한 트라우마로 얼룩졌지만 이들이 살아낸 삶 그 자체가 바로 용기의 증명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그들에 의해 구원받고 살아남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왜 이런 전쟁을 합니까? 무기를 사들이는 게 평화가 아닙니다. 휴전선에 봄이 와야 진정한 해방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조선인 창녀’라 조롱하며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는 일본 극우세력,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는 외교 부처, 그리고 남성 중심적인 전쟁과 폭력의 역사에 맞서, ‘아직 해방 받지 못한’ 할머니들의 몸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저 너머 어딘가 있을 평화의 땅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나비는 날아올랐다. 폭풍우가 치게 하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이 글은 2016.11.14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다큐멘터리 초이스에 실려있습니다.

Posted by 미와카주


독극물에 마비된 채로 죽은 두 남자. 

그 와중에 자기 말마따나 XX는 지킨 백작.

<아가씨>의 나쁜놈들 응징 장면을 본 지인이 “다 좋은데 나쁜 놈들에게 너무 고상한 죽음을 선사했다”며 어쩜 그게 나쁜놈들과 동성을 지닌 ‘남자’ 감독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두 여자의 인생을 망치고, 그 중 한 여자를 죽게하고, 또 다른 여자의 인생까지 망치려 했던 쳐죽일 짓을 왜 그리 별거 아닌 것처럼 처리한건지. “물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런 어리석은 짓꺼리를 하는게 결국 인간”이라고 퉁치는 듯한 희화화된 결말에 심히 기분이 나빴다고 말이다. 


스스로 손에 가위를 박고 배에 못을 내려치는 <비밀은 없다>의 장면들은 여자감독의 작품이면서도 어딘가 박찬욱스러운데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엔딩에서 연홍(손예진 분)이 종찬(김주혁 분)을 응징하는 방식을 보고나면, 영화가 박찬욱스러운 것은 단지 어떤 스타일에 불과할 뿐 그 본질은 매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머리도 좋지않고 눈치도 없는 엄마 연홍. 남편 종찬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첫 날, 딸 민진이 실종된다. 경찰도 남편도 남편의 선거 캠프도 일단 사태의 추이를 ‘이성적으로’ 지켜보자고 한다. 그런데 이쁜거 빼곤 그닥 볼 거 없어보이는 이 여자는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순하지 않다. 딸의 실종에 정신 못차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어디든 찾아가서 되는대로 헤집어놓고 히스테리를 부린다. 한 마디로 요령없이 일직선으로 사건을 파고든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끔찍한 진실 앞에서 연홍은 그야말로 온 몸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테리를 못 이겨 복수를 망치지도 않는다. 분노의 삽질과 비닐 졸라매기로 남편을 죽음 목전에 이르게 해놓고는, 마지막 순간 남편의 숨구멍을 풀어주며 이를 갈듯 말한다. 


“여기서 너를 죽이면 내가 지는거야. 끝까지 살아 봐.” 


모든 사건의 출발이자 목표였던 남편의 선거 승리에 똥물을 뿌리며 남편을 사회적으로 살인하는, 그야말로 분노에 걸맞는 복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적으로’ 행한다.


보통 이런 식의 이야기에는 갈 수 있는 전형적인 몇가지 길이 있다. 연홍이 진실을 견디지 못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남편을 죽이거나. 만약 자신과 딸의 인생을 똥구덩이에 처박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선거에 눈 멀어 딸을 살인청부한 남편을 죽이는 것으로 연홍이 복수를 완성했다면, 남편의 죄는 죽음 그 자체로 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치지도 죽이지도 않고, 섹스비디오를 상대 후보 홈피에 올려 남편이 가장 원했던 승리를 눈앞에서 짓밟고 거기다 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가진 채로 평생 ‘살아가게’ 만든 연홍의 복수는 현실에서건 영화에서건 우리가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죄의 무게를 그대로 지게하는 복수’라는 복수의 이상향을 목격하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불편하다면 정확히 이 반대 지점에서일거다.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연홍이 차라리 종찬을 죽였다면, 그랬다면 둘 다 공평하게 주고 받은걸로 치고 ‘결함없는 인간은 없다’는 익숙한 윤리적 면죄부를 종찬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 연홍이 미쳐버리고 종찬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통에 홀로 몸부림치는 결말이었다면, ‘원래 세상은 부조리해’라는 체념을 뱉으면서도 어쩐지 삶을 고차원적으로 통찰한 것 같은 허위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어떤 면죄부도 허위 의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봐라. 니가 죄의식조차 없이 저지른 짓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었는지” 일갈하며 착실히 죄값을 치르게 한다. 또한 살인에 살인으로 응하지 않고 자기가 저지른 일만 딱 그대로 세상에 고백하는 결말 때문에, 종찬의 불륜을 그리 죽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일말의 반박거리마저 앗아간다. 얼마나 숨이 막히겠나.       


이 영화가 불편하다는 또다른 측에서는 스릴러 장르의 익숙한 장치에 기대지 않은 색다른 연출적 시도들을 그 이유로 든다. 

  

다소 방만할 정도로 반복되는 주제 선율(leitmotif). 

추리와 혼란을 동시에 야기시키는 디제틱 사운드와 논디제틱 사운드의 혼용. 회상 및 진술 장면에서 익숙한 플래시백 대신 사용되는 CG 처리된 프리즈 화면.   

피가 튄 미옥의 교복을 대신 입은 아이의 단추가 툭 하고 터지자 “넌 왜 그렇게 교복을 타이트하게 입니? 그게 스타일이니?”하는 연홍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단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대목마저 의도적으로 코믹 릴리프처럼 처리하는 방식. 


연출적으로 낯선 시도는 그것이 서사에 찰떡처럼 달라붙을 때에야 비로소 호응을 얻는다. 개인적으로 소녀들의 우정과 감수성을 표현한 시퀀스는 감독 특유의 색깔이 서사에 개성을 입힌다고 느껴졌지만, 그밖의 시도들은 좀 더 친절한 표현법을 고민해봤어도 좋았을거란 생각이다.


마지막 장면. 

“우리 딸이 지 엄마는 좋다 하디?”하는 연홍의 질문에 딸의 친구는 “엄마는 너무 멍청해서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딸의 말을 전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순히 ‘모성애’를 알리바이로 삼는 복수극이 아니라, 한 가족 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모녀가 서로의 고통에 처절히 분노하고 그 분노를 지지대 삼아 서로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녀들과 모녀 사이의 유대가 영화의 강력한 테마로 작용하는 반면, 정치판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유대는 음험하고 얄팍하기 그지없다. <아가씨>에 이어 <비밀은 없다>가 올해의 여성연대 2탄쯤으로 환호받는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일부분 박찬욱스럽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다. 특히 올해의 박찬욱 작품인 <아가씨>와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아가씨>에서 여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분노가 이른바 ‘뒤통수 때리는 탈출의 경쾌함’ 속에 희석되어버렸다면, <비밀은 없다>의 모녀는 있는 힘껏 분노를 발산하되 그 분노로 복수를 망치지도 않는다. 기쁨은 덜하지만 좀 더 정의롭다고 할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미련하거나 혹은 미련이 많아서 제대로 된 복수도 못한 채 ‘부조리한 삶’에 강제적으로 적응하는 여자들이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스크린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Posted by 미와카주

두달여간, 나를 두근거리게도 피곤하게도 했던 드라마가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있다"란 말을 남긴 채 방금 끝났다.


한번도 철저히 파헤쳐지고 제대로 마감된 적이 없어 늘상 되풀이되는 재난 속을 살아가는, 마치 거대한 미제사건 덩어리같은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은유.
문제 해결에 현실적 서사가 아닌 '과거로부터 온 무전'이라는 주술적 서사를 동원했지만, 이를 통해 급기야 현실적 공명을 일으키는 파급력. 


드라마 <시그널>이 보여준 성취는 말할수 없이 대단했고, "포기하지마라" "미래는 바꿀수 있다"는 드라마의 직설 화법은 잠들어있던 투쟁심을 꿈틀거리게 했다. 


한때,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르크스도,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도, 6.8혁명의 프랑스 대학생들도, 87년 광장에 모인 한국 사람들도 다들 이런 꿈을 꾸며 그 가능성에 전율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느냐고,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살기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모양을 바꿔 덮쳐오는 파도로 인해 혹독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꿈을 꾼 사람들 덕에 지금 우리 손으로 대통령이라도 뽑을수 있게 됐지 않았느냐고 소심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하며 어깨걸고 싸운다고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그야말로 복잡다단한 세상에 살고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그널>이 일깨운 투쟁의 불씨를 있는 그대로 믿고 실행하기엔 너무 냉소적이고 지친 시대에 와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적당히 지쳐있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감상하던 내 주의를 끈 것은, 극중 이재한 형사의 어떤 태도였다. 돈과 권력이 바로 세상 이치라며 "니가 이길수 있을것 같아"라며 이죽거리던 김범주와 대충 하고 그만두지 언제까지 그렇게 피곤하게 살거냐는 동료형사들의 충고에도, 수그러들지 않은 어깨로 "그렇게 살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꼿꼿이 가던 길을 가는 이재한의 태도에는 정치적 투쟁심을 넘어서는 어떤 품위마저 느껴졌다. 


"나랑 생각이 달라? 그래. 그럼 넌 니가 믿는대로 살아라. 난 내가 믿는대로 살테니". 그렇게 남들이 포기한 사건을 좇아 골목을 누비며 수첩을 들고 기록하는 그의 모습은, 나쁜놈한테 잡혀 변을 당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성실하게 걷고 뛰고 묻고 있을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한다. 그의 그런 성실함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연쇄살인으로 첫사랑을 잃고난 이재한에게, 수사란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떼어낼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연민은 범죄자에게는 죄를 묻고 피해자에게는 제대로 된 진상을 밝혀줘야 한다는 믿음과 '뿌린대로 거둔다'는 세상만사의 섭리를 존중하고 지켜내려는 의지로 연결된다. 의협심이나 투쟁심만으로 이어가기에 돈과 권력, 조직의 압력은 때론 촘촘하고 때론 너무 강력하다. 더구나 그런 붉은 색깔의 감정은 시간 속에서 바래기도 쉽다. 그래서 난 이재한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십여년 넘게 지켜준 강력한 동기는 아마도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고, 유불리가 아닌 자신의 삶의 태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우리가 이재한을 보고 느끼는 감동은 여기서 비롯되는게 아닐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협상을 하고싶다면 테이블로 나올 새누리당을 배려하라는 정치공학적 충고를 거리낌없이 하는 젊은 정치인을 보면서, 정말이지 품위따위 없는 세상을 살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민이 사라진 세계에는 품위도 함께 실종된다.


Posted by 미와카주